박현영 국립보건연구원장이 23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종로구에서 '노쇠도 질병이다'라는 주제로 열린 한국과학기자협회 미디어 아카데미에서 발표하고 있다./한국과학기자협회

한국이 초고령사회를 눈앞에 두고 있다. 통계청이 지난 11일 발표한 인구추계를 보면 내년 65세 이상 내국인 고령 인구는 1000만명을 넘어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하게 된다. 기대수명은 2022년 기준 82.7세, 앞으로 생활환경이 개선되고 의료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더 늘어날 수 있다.

모두가 장수를 원하지만, 단지 오래 사는 게 전부는 아니다. 말 그대로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통계청 조사에서 한국인들의 기대수명에 유병 기간을 뺀 건강수명은 65.8세에 그쳤다. 무려 17년 가까이는 크고 작은 병을 달고 살며 노년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건강하지 못한 노년의 삶의 원인을 ‘노쇠’라는 단어에서 찾고 있다. 노쇠는 여러 장기의 심각한 기능 감소와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가벼운 스트레스에도 기능이 많이 감소하고, 잘 회복하지 못해 수발이 필요한 심각한 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 노쇠는 신체가 매우 취약해진다는 점에서, 나이를 먹어 자연스럽게 겪는 노화와는 다른 개념이다.

국립보건연구원은 지난 23일 서울 광화문에서 ‘노쇠도 질병이다’라는 주제로 한국과학기자협회 미디어 아카데미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박현영 보건연 원장과 김영진 유전체연구기술개발과 보건연구원이 노쇠 연구의 필요성과 한국 노쇠 연구 현황에 대해 발표했다.

그래픽=정서희

노쇠는 출생 이후의 ‘연대기 나이’보다 인체 기능을 측정한 ‘생체 나이’가 더 늙은 ‘가속 노화’와 같은 의미다. 노쇠 정도가 심하면 당뇨와 고혈압 같은 대사 질환 발병 확률도 높아진다. 생체 나이가 연대기 나이보다 5년 더 많은 경우 당뇨는 119.2%, 고혈압은 33.8% 발병 확률이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이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노쇠로 인한 사회적 비용도 증가하는 추세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노인 돌봄 예산은 2020년 1조8431억원으로, 4년 전인 2016년(8137억원)보다 126% 늘었다. 노쇠는 인체 기능을 유지한다는 측면에서 미리 예방하고 대비할 수 있는 만큼, 관련 연구를 진행해 정부가 대비하면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박현영 원장은 “한국의 고령화가 점점 심해지는 만큼 노쇠 연구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며 “노쇠는 전노쇠 단계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면 진행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단순히 과학자들이 노화 기전 연구를 넘어서 사회가 노쇠를 예방하고 관리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지 밝히는 지속적인 연구의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국민의 노쇠 원인과 대응책을 찾기 위해 ‘한국 노인노쇠 코호트(KFACS)’를 운영하고 있다. 이 코호트는 지역사회에 거주하는 70~84세 노인 3011명을 대상으로 노쇠 현황을 조사한다. 또 한국인 노쇠를 심층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한국인 유전체 역학조사(KoGES)’도 진행중이다. 경기도와 농촌 지역에 거주하는 40~69세 성인을 대상으로 노화 기반 데이터를 구축한다. 코호트 조사를 통해 남녀 노쇠 원인이나 근감소증과의 연관성, 노쇠 바이오마커 관련 연구 성과를 냈다.

4일 서울 은평구 서북병원에서 어르신들이 물리 치료를 받고 있다./연합뉴스

노쇠를 측정하는 데에는 디옥시리보핵산(DNA) 속 유전자 정보를 분석하는 기술이 사용된다. DNA 속 사이토신 염기에는 생활습관과 환경에 따라 수소와 탄소로 이뤄진 ‘메틸기’가 붙는다. 이 메틸화 현상은 사라지지 않고 DNA에 새겨지게 되는데, 유전자 발현을 조절해 노화에 영향을 미친다.

메틸화 정보는 생체 나이 측정에 유용하게 사용된다. 보건연은 작은 막대기 크기 칩에 특수 처리된 DNA를 넣어 광학 스캔으로 메틸화 정도를 파악한다. 메틸화 분석은 별다른 진단법 없이 혈액 채취만으로 가능하고, 빠르게 노쇠 정보를 얻을 수 있어 최근 보건 분야에서 많이 활용되고 있다.

김 연구원은 “메틸화 정보는 DNA에 새겨진 정보기 때문에 정밀진단 없이 혈액만으로 노쇠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며 “노쇠가 빨리 이뤄지는 가속 노화가 어떤 조건에서 발생하는지 밝힐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가속 노화는 인지 장애와 뇌 노화, 감각 운동 기능 감소, 대장암 발생 등 많은 질병의 원인”이라며 “노쇠를 사전에 방지하면 다양한 질환을 막을 수 있다는 점을 중심으로 노쇠 연구를 진행 중”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