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정다운

국내 바이오벤처 A사는 최근 미국 보스턴으로 본사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 면역억제제를 개발하는 이 회사는 지금까지 약 50억원을 투자 받았다. 하지만 이 정도 규모로는 동물실험(전임상)까지만 가능하다.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임상 1상에 진입하려면 투자를 추가로 유치해야 한다. 이 회사는 당초 국내 증시 상장까지 염두에 뒀다. 하지만, 자본시장이 빠르게 얼어 붙으면서 사정이 급변했다.

A사는 계획을 바꿔 글로벌 투자 유치에 나섰지만, 해외 투자자로부터 연구비를 투자받는 것은 쉽지 않았다. A사 관계자는 “미국 상황도 만만하지 않겠지만, 본사를 미국으로 옮겨 직접 부딪히면 회사의 가치를 좀 더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금난에 빠진 국내 바이오 벤처들이 추가 투자를 받기 위해 미국으로 본사를 옮기거나 자회사를 세울 계획을 갖고 있다. 미국으로 본사를 옮겨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워 이전까지 검토했다. 하지만 세금 문제가 걸림돌이었다. B사는 내년에도 투자자를 구하지 못하면, 불이익을 감수하고도 미국으로 본사를 옮겨 투자를 받을 계획이다.

자금난에 빠진 국내 바이오벤처들이 추가 투자를 받기 위해 미국으로 본사를 옮기거나 자회사를 세울 계획을 갖고 있다.

25일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올해 3분기 국내 바이오벤처 투자액은 1조2110억원에서 8787억원으로 27% 줄었다. 벤처캐피털(VC) 신규 투자액이 같은 기간 5조3752억원에서 5조3153억원으로 소폭 줄어든 것과 감안하면 바이오벤처 분야 감소폭이 가장 크다.

바이오벤처 투자액은 지난해 3분기 1조2110억원에서 지난 3분기 8787억원으로 줄었다. 반면 전체 투자액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한국벤처투자협회

돈줄이 마르니 상장을 포기하는 업체도 생겼다. 바이오인프라는 지난 21일 상장을 철회했다. 상장을 앞두고 기업 가치를 평가 받는 수요예측 단계에서 예상보다 낮은 평가를 받아서다. 바이오인프라 관계자는 “최근 금리 인상과 인플레이션으로 증시가 침체돼 기업 가치를 제대로 평가 받기 어려워 공모를 철회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올해 상장을 포기한 바이오벤처는 8곳에 이른다. 바이오벤처들이 상장에 실패하면서 벤처 업계는 물론 투자 업계에서도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VC가 투자한 기업이 상장해 기업의 지분을 팔아야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종현 에이온인베스트먼트 대표는 “당분간 국내에서 투자받기 어렵다는 판단에 해외 투자자를 찾는 바이오벤처가 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국내 증시 상장은 포기하고 해외 투자 유치 쪽으로 눈을 돌린다는 것이다. 미국의 보스턴의 경우 훌륭한 생명과학 연구인력과 연구 인프라를 갖추고 있기도 하다.

올들어 해외 투자에 성공한 사례들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코스닥 상장을 철회한 피에이치파마는 지난 7일 미국 나스닥 스팩사와 합병하는 방식으로 미국 시장에 진입했고, 올들어 1000억원 대의 투자자금을 확보했다.

지놈앤컴퍼니는 지난 3월 미국 자회사를 통해 586억원을 투자받았다. 지난 3월 본사를 미국 샌디에이고로 옮긴 지놈인사이트는 한 달만인 지난 4월 미국 VC 파라투스인베스트먼트 등을 통해 285억원을 투자 받았다.

이런 성공 사례가 나오면서 국내 바이오벤처의 해외 진출은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업계 한 관계자는 “기술력은 뛰어나지만 국내에서 투자받기 어려운 사업 모델이나 파이프라인을 가진 업체들은 중심으로 미국 진출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벤처 업계는 물론 투자 업계가 국내 증시에서 바이오 벤처가 외면 받는 현실을 반성해야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병건 지아이이노베이션 회장도 “국내 일부 벤처캐피탈들은 투자금 회수를 목적으로 바이오벤처 상장을 계획하고, 이를 위한 무리한 임상을 요구하기도 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