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올해 1분기 기준 국내 매출 상위 500대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이 6.3%. 하지만 건설·부동산 업계의 여성 임원은 1.0% 수준에 불과하다. 시공능력 10대 건설사 중에서도 여성 임원이 없는 경우도 많고 있어도 아직은 1~2명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는 그만큼 남성 중심적 문화가 지배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는 업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아직 손꼽히는 수준이긴 하지만 여성 임원과 대표가 곳곳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 이들을 만나봤다. 그들이 생각하는 일은 무엇이고 어떻게 일을 하고 있을까.

“처음 개발사업부문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두근거렸어요. 개발사업이 시공사, 운영사, 투자회사 등 다양한 이해관계가 섞인 곳이라 매력적인 분야라고 느껴졌거든요. 지금 하고 있는 글로벌법무계약도 여러 분야를 한꺼번에 봐야 하는 곳입니다. 일이 고되지만, 늘 공부할 수 있는데다 회사의 중요한 순간에 기여할 수 있어 좋습니다.”

지난 5일 서울 서울 종로구에 있는 SK에코플랜트(옛 SK건설) 본사에서 만난 이현경 글로벌법무담당 부사장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을 따라 인생을 그렸다고 했다. 아나운서로 일하다 40살에 낯선 뉴질랜드에서 처음 법학 공부를 시작했던 일,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난생 처음 건설사 일을 시작했던 것 모두 익숙함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에 도전했던 일이다.

이현경 SK에코플랜트 글로벌법무담당 부사장. /SK에코플랜트

그의 도전정신은 회사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일을 맡았을 때 유감없이 발휘됐다. 최근 SK에코플랜트는 싱가포르 사모펀드(PEF) 운용사인 나비스캐피털파트너스로부터 전기·전자 폐기물 처리 회사인 테스를 인수했다. 이 부사장은 지난해부터 명절 연휴·여름 휴가도 전부 반납하고 이 프로젝트에 뛰어든 끝에 90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5개 분야 계약 협상을 모두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했다.

SK에코플랜트가 본격적인 글로벌환경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처럼 중요한 순간마다 닿은 이 부사장의 손길이 뒷받침됐다. 앞으로는 그가 속한 팀이, 후배들이 이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도록 자랑스럽고 즐거운 조직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 이 부사장의 목표다.

ㅡ건설사에서 일하게 된 계기는.

“졸업 후 아나운서로 6년을 일하고 5년을 편성피디로 근무했다. 셋째 아이를 낳으면서 직장을 그만뒀다. 마흔살의 나이에 뉴질랜드로 넘어가 법학을 공부했다. 뉴질랜드는 ‘지루한 천국’이라고 불린다. 큰 성장과 도약보다는 안정감을 느끼며 일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SK건설에서 제안이 왔고,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고 생각해 47살에 한국으로 왔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단순한 업무였으면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운영사, 투자회사 등 이해관계가 굉장히 복잡하고 그 안에서 갈등과 협상도 많은 개발사업에 참여한다는 것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ㅡ그동안 해낸 일 중 기억에 남는 일은.

“12년을 있었는데 매년 업무가 바뀌었다. 가장 재미있었던 일은 클레임 태스크포스(TF)에서 했던 일이었다. 2013년 당시 해외에 진출했던 대부분의 건설사가 저가수주를 하면서 대형 적자를 냈다. 만회할 수 있는 길이 딱 하나 있었다. 공사기간 지연으로 발생하는 비용을 어느쪽이 부담하는지 해석하고 비용 정산을 요청, 설득하는 클레임 업무였다.

TF가 생길 때 손을 들고 합류했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TF팀 인원은 3명밖에 없었다. 공사기간을 연장받고 이로 인해 드는 간접비도 같이 청구했다. 회사는 이후 2~3년만에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외부 컨설팅 없이 모든걸 우리가 직접 진행하니 컨소시엄으로 클레임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회사의 다른 팀에서도 서비스 요청이 들어왔다. 책상에 80개가 넘는 파일을 쌓아두고 일했던 때도 있었다. 47살에 회사에 들어와 처음 해보는 일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공부를 놓아 본 적이 없는데, 일을 시작하기 전 책을 많이 읽었던 것이 도움이 됐다.”

이현경 SK에코플랜트 글로벌법무담당 부사장. /SK에코플랜트

ㅡ요즘은 어떤 일을 하나.

“법무계약그룹으로 옮겨 최근에는 싱가포르 기업 ‘테스’ 인수 작업에 참여했다.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테스는 전기·전자 폐기물, E-폐기물 전문 기업이다. SK에코플랜트가 글로벌 IT기기 및 전기차 배터리 재활용·재사용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중요한 계약이었다.

파는 곳은 사모펀드였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테스는 22개국에서 43개에 달하는 처리시설을 운영 중이었다. 금융, 세금, 법무 등 5개 분야를 90일 내에 모두 검토하고 계약 협상을 동시에 진행해야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지난해부터 명절이랑 여름휴가도 모두 반납했다.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고된 일이었지만 회사가 글로벌 환경 기업으로 거듭나는데 발판이 됐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 만으로도 굉장히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ㅡ40대에 하는 도전이 쉽지는 않았을텐데.

“47살에 낯선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처음엔 사람들이 쓰는 용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해 ‘나는 왜 이것밖에 못할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차 안에서 많이 울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견디기밖에 없었다.

내 인생의 모토는 ‘어라운드 코너’다. 인생이 항상 헤맬 것 같지만 견디다 보면 모퉁이를 돌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ㅡ남성이 대부분인 건설업계에서 여성으로서 고충도 있었을 것 같다.

“2014년 말 처음 SK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여성 팀장이 없었다. 지금은 회사가 달라지고 있다. 여성 팀장은 너무 많고, 임원도 지난해 1명에서 4명이 늘어 현재는 5명이나 됐다. 편견을 제거했더니 모두 잠재력이 나타난 결과라고 본다.

5년 후에는 ‘여성임원’이 아닌 ‘임원’만 있는 시대가 올 것이라 생각한다. SK는 그런 점에서 굉장히 열려있는 기업이다. 지금도 SK가 아니었으면 임원이 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ㅡ리더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꿈을 가져야 한다. 허무맹랑해도 내가 어떤 것에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살펴보는게 시작이다. 두번째는 꿈을 이룰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노력해야 한다. 포기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안타깝다. 마지막으로 계속 공부해야한다. 끊임없이 공부해야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다.

앞으로는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바닥일 때도 있었지만 나도 여기까지 왔으니 당신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는 것이다. 지금 있는 팀에서부터 즐겁고 선물 같은, 자랑스러운 조직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