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이전하면 아무래도 이런저런 제약이 풀리겠죠? 저같이 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 쪽으로 관심이 가요”

지난 26일 북악산 백악쉼터에서 마주친 50대 여성은 윤석열 당선인의 청와대 이전 추진에 대해 “정치적인 건 사실 잘 모르겠고 등산객 입장에서는 그렇다”고 웃으며 말했다.

북악산 서울성곽길의 안내문 /유병훈 기자

청와대와 경복궁을 품고 있는 북악산은 누구나 감탄해 마지않을 산세(山勢)를 자랑한다. 더구나 서울 강북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만큼 어느 곳을 바라봐도 서울 시내가 훤히 보이는 ‘뷰 맛집’이기도 하다.

오랜 기간 시민들은 이 명산을 마음껏 향유하지 못했다. 지난 1968년 이른바 ‘김신조 사태’의 침투로로 활용되면서 민간인의 출입을 금하고 경호 시설과 인력을 밀집 배치했기 때문이다. 지난 2006년 4월에서야 한양도성의 북악산 구간 1.1km가 개방됐고, 2007년 4.3km가 더 열렸다. 그나마도 신분 확인 절차를 거쳐야 했으나 2019년 상시개방으로 바꾸면서 비로소 신분 확인 절차가 없어졌다.

◇ 靑 이전 추진에… 등산객들이 더 반기는 이유

그럼에도 여전히 북악산길 곳곳에는 청와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4곳에 이르는 등산 출입문에서는 각각 안내소에서 한 사람당 한 개씩 표찰을 받고 목에 걸어야 한다. 출입시간도 정해져 있다. 계절에 따라 오후 5~7시 안에는 하산해야 하고, 그로 인해 3~5시부터는 입산이 제한된다. 안내소 관리인은 “출입시간을 넘기면 안 된다. 꼭 시간을 확인하시기 바란다”고 신신당부했다.

입산하더라도 통상의 등산로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등산로 바로 옆에는 촬영 시 처벌할 수 있다는 경고문이 부착된 경호 시설이 있었고, 주요 쉼터와 정상은 청와대가 보이지 않는 위치일뿐더러 촬영을 막는 인력까지 배치됐다.

불편함을 감수했던 등산객들이 청와대 이전에 기대를 거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부천에서 왔다는 또 다른 등산객은 “출입 제한 시간 때문에 올 때마다 신경 쓰이는 게 사실”이라며 “청와대 이전으로 제한이 없어지면 국민들에게 훨씬 친근한 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삼청공원 인근 한 식당의 주인은 “아무래도 출입 제한 시간만 없어져도 저녁까지 등산객 손님이 더 몰리지 않겠나”라며 “코로나19로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희망찬 뉴스임은 분명하다”고 했다.

군부대 출입구와 유사한 북악산 안내소(왼쪽)와 북악산 성곽길의 군사시설 /유병훈 기자

시간제한 완화보다 등산객들에게 더 큰 기대를 주는 것은 새로운 등산로 개방이다. 50대 부부는 “북악산에 종종 오지만 등산로가 딱 정해져 있어 산을 다 안다고는 못한다”면서 “특히 청와대 쪽에 또 얼마나 많은 비경(秘境)이 숨겨져 있는지는 모를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청와대 이전으로 새 등산로가 열린다면 가장 먼저 오고 싶다”고 했다.

삼청공원에서 만난 동네 주민도 “청와대 때문에 삼청동에서 효자동까지 북악산으로 넘어가려면 가파른 능선을 타고 갈 수밖에 없는데 나이 든 사람들은 엄두도 내기 힘든 일”이라며 “청와대 이전으로 보다 완만한 경사의 산책로가 생긴다면 삼청동과 효자동 주민들이 더 편하게 산책할 수 있고, 구경 오는 사람들도 더 많아지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 북악산-청와대 따라 ‘시크릿 가든’ 열린다… 다양한 볼거리 가득

북악산 한양도성의 성곽 밖 북쪽 지역을 개방하기 위한 논의는 이미 진행 중이다. 서울시와 청와대는 지난 2020년부터 민간인의 출입이 제한됐던 북악산 북쪽 지역을 2단계로 나눠 개방하기 시작했다.

2020년 개방된 1단계 구간은 청운대~곡장~말바위안내소 구간의 성곽에서부터 북악산길(스카이웨이) 사이 구간이다. 청와대는 성곽 철책을 제거해 청운대~곡장 구간의 성곽 바깥쪽 탐방로를 개방하고 시민들이 걸을 수 있는 녹지로 조성했다. 올해 상반기 개방될 2단계 구간은 성곽 남쪽 구간으로, 삼청공원 후문과 숙정문 사이 영역이 그 대상이 될 예정이다. 1·2단계 개방을 통해 약 110만㎡, 여의도공원의 4.8배에 이르는 면적이 시민에게 개방된다.

그래픽=이은현

그러나 여전히 북악산 면적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삼청공원 후문 이남의 길은 미개방 상태다. 이곳에는 북한의 전투기·탄도 미사일 요격을 위한 군사시설이 배치돼있고 많은 인력이 청와대를 경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공간까지 개방되면 50년 넘게 막혀있던 공간이 열리고 다양한 자연환경과 생태계를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손성일 코리아트레일 대표는 “청와대가 개방되면 청와대에서 숙정문 인근까지 등산로 형태로 연결하는 코스가 생길 것”이라면서 “아마 한 시간 정도면 걸을 수 있는 거리가 될 텐데, 숨겨진 자연환경과 ‘김신조 루트’(김신조 사태 당시 서울에 침투한 무장공비들이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고 도주했던 길) 등 볼거리가 많아 상당히 드라마틱한 공간이 될 것”이라고 했다. 손 대표는 서울 ‘걷기 좋은 길’ 조성 자문위원과 ‘걷는 도시, 서울’ 시민위원 등으로 활동한 도보 전문가다.

청와대 내부로 들어오면 더욱 다양한 볼거리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는 당초 경복궁의 후원으로 쓰이던 장소로, 고종은 이 공간을 임금을 위한 사적 공간으로 활용했다. 과거 농경지, 정원 등 다양한 공간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시절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졌다. 그러나 조선 시대 후궁 7명의 위패를 모신 ‘칠궁’, 흥선대원군이 지은 ‘오운정’ 등 남아있는 문화유산이 아직 많다.

이희정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북악산에서부터 청와대를 지나며 걷다 보면 김신조 침투 사건이 벌어졌던 지역을 지나 조선 시대의 숨겨진 역사 장소들을 보고, 대통령 관저까지 두루두루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면서 “수십 년간 감춰져 있던 ‘시크릿 가든’이 열리는 셈”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청계천복원위원회 도시계획분과 위원, 서울 종로구청 문화지구 심의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 ‘광화문~용산~한강’ 잇는 도심 축 완성… ‘서울판 샹젤리제’로 탈바꿈

청와대 개방으로 북악산과 광화문, 용산을 잇는 서울의 남북 녹지 축이 연결되는 것도 관심거리다. 남북 녹지 축은 서울시를 종으로 가로지르면서 다양한 생물 종의 서식지 역할을 하는 한편, 보행자에게는 도시의 자연을 체험하게 한다. 청와대 개방으로 그간 반쪽짜리였던 북악산이 제 모습을 갖추게 되면 서울의 주요 경관 축을 형성하게 된다.

대통령 집무실이 들어서는 용산의 녹지는 더욱 확대될 예정이다. 용산역의 한쪽에는 옛 용산철도 차량기지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국방부 청사와 약 80여만 평(3.3㎡) 규모의 미군기지 등이 있다. 향후 용산철도차량지구가 국제업무지구로 탈바꿈하고, 국방부 청사와 미군기지가 각각 대통령 집무실과 공원으로 바뀔 경우 용산에는 서울숲의 2배 규모의 생태공원이 조성된다.

22일 지난 2020년 개방된 서울 용산공원 장교숙소 5단지 전시공간을 찾은 시민들이 용산일대 미군기지 모형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손성일 대표는 청와대 개방과 용산공원 확장으로 서울에는 약 35km 길이의 도보 코스가 생겨날 것으로 보고 있다. 북악산 정상인 백악마루에서 시작해 ▲북악산과 인왕산, 남산을 도는 길 ▲북악산과 남산을 거쳐 용산공원으로 가는 길 ▲청와대, 광화문, 서울역을 거쳐 한강에 닿는 길 ▲한강에서 출발해 용산가족공원과 국립중앙박물관을 거쳐 용산공원을 도는 길 등이다. 시속 4.5km 속도로 8시간을 걸으면 북악산과 한강을 오갈 수 있게 된다

현재 서울시가 추진 중인 경부선철도 지하화가 실현될 경우 도심에는 철길을 따라 또 다른 산책길도 생긴다. 이 사업은 서울역~삼각지~용산~한강으로 이어지는 경부선을 지하화하고, 지상에 저층 상가와 녹지를 형성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사업이 끝나면 동쪽으로는 용산공원과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경의선숲길과 연결돼 녹지 축이 더욱 확장된다.

그래픽=이은현

도심을 가로지르는 길은 도시의 과거에서부터 현재, 미래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가 대표적인 사례다. 샹젤리제 거리는 개선문에서부터 콩코드 광장까지 이어지며, 이 길의 끝에는 파리의 부도심이자 첨단업무시설이 밀집한 라데팡스가 있다. 이 길을 걷다 보면 나폴레옹 시대에서부터 18세기 프랑스 혁명을 체험하고, 현대 파리의 위상을 느낄 수 있다.

청와대와 광화문, 용산, 한강을 가로지르는 길도 한양도성에서부터 현대화된 용산으로 이어지는 ‘서울판 샹젤리제’의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 서울시는 지난해 청와대를 뺀 나머지 구간을 국가상징 거리로 조성하기 위해 기본계획에 착수했다. 서울역 역세권과 용산정비창 일대, 용산공원, 노들섬 주변을 아우르는 이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서울은 걷고 싶은 명소로 탈바꿈된다.

이희정 교수는 “청와대에서부터 경복궁, 광화문을 거쳐 국제업무지구와 대통령 집무실이 들어설 용산까지 가는 길이 열리면 서울의 과거와 현대를 잇는 길이 된다”면서 “파리의 샹젤리제처럼 국가 상징 가로(街路)의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