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 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29일(현지 시각) 문재인 대통령과 프란치스코 교황의 면담을 특별 수행했다. 대한상의 현직 회장이었던 3년 전 문 대통령과 프란치스코 교황의 첫 번째 만남 때도 동행했었다. 그런데 박 전 회장은 ‘기업인’이 아닌, ‘몰타기사단 한국 대표’ 자격으로 교황청을 방문한 것으로 나타났다.

몰타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 남쪽에 있는 남유럽의 섬나라인데, 박 전 회장은 어떻게 ‘몰타기사단’의 한국 대표가 됐을까.

29일 교황청을 공식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프란치스코 교황과 단독 면담에 앞서 DMZ 철조망을 잘라 만든 '평화의 십자가'를 설명하고 있다.왼쪽 줄 네 번째가 박용만 전 대한상의 회장. '평화의 십자가'는 박 전 회장이 기획했다. /교황청 제공

◇11세기 예루살렘에서 시작…16세기 몰타에 정착

‘몰타기사단(Sovereign Military Order of Malta)’은 9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현재는 몰타라는 지역과 관련은 없고, 기사(knight)와도 관계가 없다. 주권국가로서 세계 100여개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고, 자국 우표와 동전, 여권을 발행한다. 그런데 통치권이 미치는 영토는 없다. 이 때문에 주권국가이면서 종교 기사단이기도 하고, 인도주의 단체이기도 한 성격을 갖고 있다.

몰타기사단은 11세기 예루살렘 성지 순례객들을 위해 세워진 병원에서 ‘구호기사단(Knights Hospitaller)’으로 시작했다. 수도사들의 봉사로 운영됐다. 그러다 12세기 초1차 십자군 원정 때 성지 순례자들의 경호를 맡으며 군사 조직으로 확대됐고,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종교 기사단으로 인정받았다.

1187년 예루살렘이 무슬림에게 함락된 이후에도 소아시아 반도에 남아 있었지만, 13세기 마지막 기독교 세력 근거지가 함락되자 키프로스 왕국으로 피신했다. 이어 14세기 동로마제국 영토였던 로도스 섬을 빼앗아 본거지를 옮겼다. 이 때는 ‘로도스기사단’이라고 불렸다.

몰타기사단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해 로마로 이동할 때까지 근거지. /몰타기사단 홈페이지

1522년 오스만제국의 술레이만 대제가 침공해 ‘로도스섬 공방전’이 벌어졌고, 로도스기사단은 6개월간 오스만의 포위를 버티다 퇴각했다. 이후 여러 곳을 전전하다 1530년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로부터 몰타섬을 증여 받고 근거지로 삼았다. 1565년 오스만제국의 군대를 4개월만에 물리치며(몰타 공방전) 명성을 높였다.

200여년 뒤 나폴레옹이 1798년 몰타 섬을 정복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길에 오르며 몰타에 항구와 보급 제공을 요구했고, 몰타기사단은 같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무력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규정에 따라 항복했다. 이후 유럽을 떠돌다가, 1834년 로마에 본부를 두고 정착했다 이 때부터 군사적인 면은 거의 사라졌고, 구호와 봉사활동을 하는 종교 조직으로만 존재하게 됐다.

몰타기사단은 현재 120여 개국 1만 3000여명의 회원과 10만명 이상의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전통에 따라 자연재해나 전쟁이 발발하면 기부금을 전달하고, 장애인, 병자, 노숙인, 노인 등을 돕기 위해 현장에 뛰어든다.

지난 18일 몰타기사단 한국 지부 회원들이 77가구에 배달할 반찬을 만들기 전 기도하고 있다. /페이스북 캡처

◇박용만, DMZ 폐철조망으로 ‘평화의 십자가’ 제작

몰타기사단은 2015년 한국에 지부를 설립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박 전 회장이 이 때부터 한국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박 전 회장은 2018년 10월 18일 문 대통령의 바티칸 교황청 방문을 수행하며 프란치스코 교황을 알현했다. 박 전 회장은 당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자 몰타 기사단 한국 대표 박용만”이라고 소개하고, “지나치게 이기적인 경영이 되지 않고, 그늘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도록 하겠다”고 말했다.박 전 회장은 당시 성베드로대성당에서 열린 ‘한반도 평화를 위한 특별미사’에도 참석했다.그는 “한반도 평화 기원 미사이니, 다른 어느 때보다 열심히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2018년 10월 18일 교황청을 공식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을 수행하는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이 프란치스코 교황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문 대통령은 지난 28일 서울공항에서 출국하면서 몰타기사단 한국 대표로서 이번 교황청 방문을 특별 수행하는 박 전 회장에게 “비무장지대(DMZ)의 폐철조망을 십자가로 부활시키는 평화의 십자가 제작 프로젝트를 해왔다”며 “남북 분단 세월의 고통과 평화에의 염원을 상징하는 십자가에 대한 뜻 깊은 행사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앞서 박 전 회장은 지난 26일 페이스북을 통해 DMZ 철조망을 녹여 만든 ‘평화의 십자가’ 전시회를 연다고 밝혔다. 전시회는 문 대통령이 바티칸 교황청을 방문하는 29일부터 다음달 7일까지 통일부 주관으로 로마 산티냐시오 성당에서 개최된다. 남과 북의 분단 68년을 합해 136개의 십자가를 만들었다. 제작은 서울대 조각가 권대훈 교수가 맡았다. 박 전 회장의 이 글은 문 대통령이 공유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참석한 가운데 29일(현지 시각) 이탈리아 로마 산티냐시오 디 로욜라 성당에서 열린 '철조망 평화가 되다' 전시회에서 박용만 전 대한상의 회장이 전시회 관련 설명을 하고 있다. /언합뉴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29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로마 산티냐시오 디 로욜라 성당에서 열린 '철조망 평화가 되다' 전시회에서 한반도를 형상화한 전시작품의 LED 촛불 점등식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