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 없는 사회가 다가오면서 발권 당국인 한국은행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노년층 등 화폐 사용이 편한 사람들까지 시장에서 현금을 사용하지 못하면 화폐 유통 시스템에 문제가 생길 우려가 있어서다.

21일 한국은행이 작년 4월 발표한 ‘지급결제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빠른 속도로 현금없는 사회(Cashless society)로 진입하고 있다. 소비자의 지급수단 중 현금이용 비중은 금액 기준으로는 2019년 17.4%에서 2021년 14.6%로, 건수 기준으로는 26.4%에서 21.6%로 낮아졌다.

◇ 간편결제 서비스 늘자 현금수요 ‘뚝’… 상점도 “현금 안받아요”

이런 추세는 신용·체크카드 등 비현금 지급수단 사용이 증가하고 모바일·PC 등을 이용한 간편결제 서비스가 늘면서 심화되고 있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비대면 거래를 선호하는 현상이 나타나자 현금 수요는 더 줄어들었다.

서울 강남구의 한 편의점에서 직원이 간편 결제 서비스 '애플페이' 안내문을 게시하고 있다. /뉴스1

최근에는 고금리 기조까지 이어지면서 이런 현상을 더욱 부추겼다. 작년 말 기준 화폐발행잔액은 181조947억원으로, 1년 전(174조8623억원)보다 3.6% 증가하는 데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증가폭 기준으로는 2004년 말(1.6%) 이후 가장 작다.

그러나 이런 ‘탈현금화’로 화폐 사용에 익숙한 노년층까지 현금을 사용하기 어렵게 되면서 문제가 되고 있다. 한은 조사결과에 따르면 2021년 상점 및 음식점에서 현금결제를 거부당한 경험이 있는 응답자는 전체 가구의 6.9%였다. 현금결제 거부 사례의 64.2%는 카페에서 발생했으며, 자영업 사업장(13.7%)과 기업형 슈퍼마켓(5.4%) 등이 뒤를 이었다.

현금결제 환경은 3년 전과 비교하면 크게 악화된 것이다. 2018년에는 현금결제를 거부당한 경험이 있는 응답자는 전체 가구의 0.5%에 불과했다. 당시에는 현금 없는 사회의 실현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낮거나 없다’고 답한 가계의 비중이 48.7%에 달했다.

한은 관계자는 “신용카드와 계좌이체 등 비현금지급수단을 통한 지출은 증가한 반면, 현금 지출의 규모 및 비중은 감소세가 지속되고 있다”면서 “비현금 지급수단 이용이 많은 일부 사업장을 중심으로 현금거래시 거래내역의 회계처리 누락 위험 등을 고려해 현금결제를 제한하는 데 기인한 것으로 조사된다”고 했다.

◇ 선진국선 현금결제 거부 금지… 한은도 ‘현금사용선택권’ 도입

발권당국인 한은으로서는 이런 상황이 우려스럽다. 현금의 결제기능이 과도하게 축소된다면 민간 결제업체의 시장지배력이 높아져 소비자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동현금인출기(ATM) 등 현금공급창구가 축소되면 화폐유통시스템이 약화될 가능성도 있다.

지난 15일 서울 중구 을지로 하나은행 본점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5만원권을 정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의 발권당국에서도 현금 없는 사회를 경계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매사추세츠주(州)와 필라델피아시(市) 등 일부 지역에서 현금결제를 법적으로 보장하거나, 현금결제 거부를 금지하는 법안이 발효됐다. 영국은 ATM 수가 적절하게 유지되도록 감독을 강화하고 있으며, 스웨덴에서도 상업은행의 현금 취급업무를 의무화하는 법안이 발효됐다.

한은도 이에 발맞추고 있다. 현재 한은은 소비자가 결제수단을 선택할 때 현금을 배제하지 않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의미인 ‘현금사용선택권’을 강조하고 있다. 한은은 금융위원회 등 관계부처와 손잡고 ATM 등 현금공급 창구 확보를 추진하고 있다. 주기적으로 현금사용행태조사 및 화폐사용 만족도 조사 등 설문조사도 실시하고 있다.

현금사용선택권과 관련된 법 개정 시도에 동참하기도 했다. 한은은 지난 2022년 이인선 국민의힘 의원이 소비자의 기본적 권리에 거래에서의 결제수단을 자유로이 선택할 권리를 명시하는 ‘소비자기본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자, 이 개정안에 동의한다는 의견을 공정위에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당 개정안은 국회 문턱을 넘지는 못했다.

한은 관계자는 “현금 사용량이 지금보다 더 늘어나도록 하자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현금 사용을 배제하지 말자는 취지”라면서 “탈현금화 현상으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고령층 등 디지털 소외계층이 현금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