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주택담보대출을 중심으로 가계대출이 늘면서 기준금리를 3연속 동결한 한국은행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한국 경제의 ‘뇌관’으로 꼽히는 가계부채가 축소 흐름을 멈추고 다시 증가세로 돌아설 경우 장기적으로 금융안정은 물론 경제 성장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가계부채는 중장기적으로 상당한 위험 요인이기 때문에 완만하고 지속적인 부채 축소가 필요하다”며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을 80% 수준까지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우리나라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02.2%로, 주요 34개국 중 가장 높다.

정부가 대출 수요를 늘리는 이른바 ‘엇박자 정책’으로 가계부채 위험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출금리 하락으로 2년 가까이 지속된 한국은행의 긴축 효과가 반감되면서 가계부채 연착륙 계획에도 차질이 생길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서울 시내의 한 시중은행 대출창구 모습.ⓒ News1 송원영 기자

◇ 주담대 금리 하락에 가계대출 4개월 만에 증가

7일 한국은행 통화정책국은 홈페이지에 올린 블로그에서 “기준금리 인상의 파급 영향 등으로 지난해 이후 주택가격과 가계부채가 조정되고 있다”며 “그러나 2020년까지 장기간에 걸쳐 큰 폭으로 누증됐던 주택가격과 가계부채 측면의 불균형이 해소됐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실제 지난해 우리나라 가계신용(가계 빚)은 7조8000억원 감소하면서 18년 만에 첫 디레버리징(deleveraging·부채 축소)을 경험했다. 한국은행이 약 1년 6개월 동안 기준금리를 0.5%에서 3.5%로 3%포인트 끌어올린 여파로 대출금리가 급등한 가운데 정부 대출규제, 부동산 시장 한파가 맞물린 결과다. 가계부채가 2000년대 초 ‘카드 대란’ 사태 이후 쉼 없이 늘어나기만 한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현상이다.

이런 부채 축소 흐름은 올해 1분기까지 이어졌다. 올 1분기 우리나라 가계 빚은 13조7000억원 줄었다. 대출금리 상승으로 이자 상환 부담이 커진 가계가 명절 상여금 등 여유자금을 빚 갚는 데 사용한 영향이 컸다.

그러나 지난 4월을 기점으로 은행권 가계대출이 다시 증가하면서 디레버리징 흐름이 약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의 대출금리 인하 압박과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3연속 동결로 대출금리가 하락한 가운데 부동산 거래가 살아나면서 가계대출 수요도 덩달아 증가한 것이다.

실제 이달 들어 시중은행의 주택담보대출과 전세자금대출 금리 하단은 3%대로 내려왔다. 이는 1년 3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대출금리 하락과 함께 주택거래도 회복되면서 지난 4월 은행 가계대출도 전월 대비 2조3000억원 늘었다.

경기도 한 아파트 단지 /뉴스1

◇ 한은 “완만하고 지속적인 디레버리징 필요”

경제학계와 한국은행 안팎에서는 부채 축소 흐름이 주춤한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집값 거품이 충분히 빠지지 않은 상태에서 주담대를 중심으로 가계대출이 다시 증가하면 향후 경제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홍경식 한국은행 통화정책국장은 “우리나라 주택가격은 여전히 소득 수준에 비해 고평가됐고,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도 주요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이라며 “장기적인 거시경제 안정을 위해서는 앞으로도 디레버리징이 중장기적 시계에서 꾸준히 지속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실제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올 1분기 우리나라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02.2%로 세계 34개국(유로 지역은 단일 통계) 중 1위를 기록했다. 조사 대상 국가 중 가계부채가 경제 규모를 넘어선 국가는 한국이 유일했다.

그간 한국은행은 과도한 가계부채가 금융불균형을 키울 뿐만 아니라 성장 발목을 잡는 위험 요인이라고 경고해왔다. 빚이 많은 가계일수록 이자상환 부담이 크기 때문에 여윳돈이 부족해지고, 이는 소비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한국은행 통화정책국이 39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3년 누적으로 1%포인트(p) 상승하면 4~5년의 시차를 두고 경제 성장률이 0.25~0.28%p 하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처럼 가계부채 규모가 GDP의 100%를 웃도는 경우 경기 침체 발생 가능성도 눈에 띄게 높아진다고 분석했다.

취약계층의 대출 부실 징후도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3월 말 국내 은행의 가계대출 연체율은 0.31%로 1년 전(0.17%)과 비교해 0.14%포인트 상승했다. 주담대 연체율은 0.1%에서 0.2%로 두 배로 높아졌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별관에서 '팬데믹 이후의 정책과제(Policy Challenges After the Pandemic)'라는 주제로 열린 2023년 BOK 국제컨퍼런스에 참석해 정책 대담을 하고 있다. /뉴스1

◇ 정부 ‘대출금리 인하 압박’이 통화정책 효과 반감 지적도

일각에서는 부동산 시장 연착륙에 사활을 건 정부가 대출 수요를 자극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한국은행의 긴축 효과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정부는 고물가·고금리로 가계의 이자상환 부담이 커지고, 은행의 ‘이자 장사’ 논란이 커지자 연초부터 은행권에 대출금리 인하를 요구해왔다. 한국은행의 긴축적 통화정책에 반하는 행보다.

문제는 한국은행이 올 들어 금리 인상을 중단했다는 점이다. 한국은행은 지난달까지 기준금리를 연 3.5%로 3연속 동결했다. 시장에서는 한국은행의 금리 인상 사이클(기조)가 마무리 국면에 진입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일부 시장 관계자들은 한국은행이 빠르면 올 하반기 금리 인하를 시작할 것이란 관측도 내놓고 있다. 추가 금리 인상을 통한 디레버리징을 유도하기 어려워졌다는 의미다.

이창용 총재도 ‘가계부채 연착륙’ 문제와 관련해 한국은행과 정부가 딜레마에 빠졌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 총재는 지난달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가계부채를 GDP 대비 80% 수준으로 분명히 낮춰야 한다”면서도 “그러나 가계대출은 부동산 정책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한국은행이 단기 통화정책을 통해서만 낮출 수는 없다”고 했다. 부채 축소만 염두에 두고 기준금리를 올리면 취약계층의 대출 부실 위험이 커지는 등의 부작용이 커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4월 들어 가계대출이 증가로 돌아선 데는 부동산 시장이 회복된 영향이 크다는 점에서 “양면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주택가격 하락세가 서서히 둔화되고 거래가 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은 단기적인 금융시장 안정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중장기적인 관점에서는 금융불균형을 키우는 요인이라 위험하다는 것이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기준금리 인하 기대감이 시장금리에 선반영되면서 대출금리가 내려가고 있고, 부동산 가격도 상승하고 있기 때문에 주택담보대출비율(LTV) 규제만으로는 가계부채가 늘어나는 것을 막긴 어려울 것”이라며 “현재로서는 완만한 디레버리징이 이뤄지려면 정부가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를 유지하고, 금융당국은 민간 금융기관의 대출금리 결정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