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미국 보스턴 바이오 클러스터의 ‘켄달스퀘어’(Kendall Square)를 본뜬 한국판 첨단산업 클러스터를 본격적으로 키운다. 켄달스퀘어는 신생 바이오벤처들이 모인 곳이다. 도보로 15분 거리 안에서 연구부터 기업공개(IPO)까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바이오 클러스터로, ‘지구상에서 가장 혁신적인 평방 마일’이라고도 불린다.

정부는 전국에 약 2000곳 정도로 난립한 산업 클러스터 중 ‘유력’ 클러스터에 집중해 육성하기로 했다. 오송·대구·송도·대덕·판교·홍릉·부산·광주 등 8개 지역이 클러스터 육성 부지로 우선 거론되고 있다.

정부는 각종 규제를 풀어 기업·지자체가 주도하는 클러스터 조성을 ‘뒷받침’하는 역할만 한다. 스타트업과 대학, 연구기관, 액셀러레이터 캐피탈(AC)·벤처캐피탈(VC), 회계·법률 서비스 지원 기업 등 클러스터 구성원들이 한데 모여 시너지를 낼 수 있게끔 입지 규제를 완화한다.

혁신 스타트업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밀집해 있는 미 보스턴 '켄달스퀘어'(Kendall square)의 모습. 이곳은 전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1 스퀘어 마일(2.59㎢)'로 불린다. /켄달센터 홈페이지

◇ 별별 클러스터 유형만 60여개… 낡은 육성 정책 ‘전환’

윤석열 대통령은 1일 기획재정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보건복지부 등 관계부처와 함께 수출전략회의를 주재하고 이런 내용을 담은 ‘첨단산업 글로벌 클러스터 육성 방안’을 논의했다. 지난 4월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보스턴 방문에 따른 후속 조치다. 클러스터는 기업·대학·연구기관·정부·지자체 등이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지식·기술을 창출하는 결집체를 일컫는다. 미 보스턴 바이오 클러스터는 근처의 매사추세츠공대(MIT)·하버드대 등과 연계한 대표 사례로 꼽힌다.

정부는 기존 클러스터 중 소위 ‘잘될 만한 곳’을 선별해 지자체와 지원 패키지를 집중한다는 방침이다. 지금껏 구사해 온 ‘낡은’ 국내 클러스터 육성 방식을 뜯어고치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운영 중인 클러스터 유형만 60여개, 개수로는 1800~1900개가 존재한다. 숫자만 많은 것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또 유사한 업종을 하나의 산단에 기계적으로 모아두는 등 시대에 뒤처진 정부 주도의 조성 정책도 문제로 꼽히고 있다.

김범석 기재부 정책조정국장은 “혁신 역량이 있는 기존 클러스터를 고도화 하겠다는 취지”라며 “과거처럼 공급자(정부) 위주의 육성 정책이었다면 세액 감면이나 재정 지원 규모가 추산되겠지만, 이번 대책은 지자체나 민간이 얼마나 역량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정부 지원 양상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에, 재정 소요 등을 미리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클러스터 관계도. /기획재정부 제공

◇ 입주 규제 풀어 구성원들 클러스터에 모이도록

우선 정부는 규제를 완화해 클러스터 구성원이 밀접하게 모일 수 있도록 지원한다. 유사 동종업종을 집적하는 데 방점을 둔 현행법상 산단이나 개별 클러스터에는 법률·회계·AC·VC 등의 입주가 제한돼 있는데, 이를 입주 가능 업종에 포함할 예정이다. 클러스터 개발·관리계획 개정을 통해 용도 변경을 용이하게 만들어, 지자체가 클러스터 육성 계획을 주도적으로 수립할 수 있게 돕는다.

클러스터 내 대·중견 앵커기업과 스타트업이 협력하면, 정부가 사업화 자금을 지원하기로도 했다. 최대 1억원 규모의 사업화(Poc) 자금과 최대 1억2000만원 규모의 기술개발 연계 지원이 이뤄지는 ‘오픈이노베이션 사업’에 가점을 부여하는 등 우대하는 방식으로다. 기출창업지원 프로그램인 ‘스케일업 TIPS(Tech Incubator Program for Startup)’ 프로그램을 클러스터 전용으로 운영해, AC·VC의 지방 이전과 지역 클러스터 스타트업 성장도 촉진한다는 방침이다.

MIT 등 해외 우수 연구기관과의 협력도 추진한다. 바이오 분야의 경우 MIT·로렌스버클리연구소와 우리나라 한국생명공학연구원·한국바이러스기초연구소 등 국내 출연연이 감염병 데이터 공유, 의사 과학자 양성, 합성생물학 공동연구 등을 추진하는 것이 가능해질 전망이다. 또 대학·출연연 등의 우수 연구자가 해외 연구기관 파견 종료 후 2~3주 내 귀국해야 한다는 요건을 완화해, 현지에서 계속 연구할 기회를 주는 방침도 검토한다.

해외 우수 연구기관-국내 연구기관 간 연구 협력 계획. /기획재정부 제공

◇ 기술혁신형 중소기업 M&A 때 세액공제액 확대

펀드 수익률 등 단기 지표에 치중한 우리 벤처투자 생태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각종 지원도 병행된다. 우선 신생 스타트업 투자 활성화를 위해 AC 중심의 ‘지역엔젤투자 재간접펀드’를 올해 200억원 규모로 신규 조성한다. 또 혁신성장펀드 내 ‘성장지원펀드’를 내년 총 1조5000억원 조성해 클러스터 입주 기업에 대한 투자를 지원할 방침이다.

또 민간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공정거래법상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탈(CVC·Company Venture Capital) 형태에 창업기획자(액셀러레이터)도 추가하기로 했다. 기존에는 창업투자회사·신기술사업금융회사만 포함됐다.

기술혁신형 중소기업 인수·합병(M&A) 세액공제도 확대한다. 이를 통해 창업에서 성장, 그리고 회수에서 재투자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촉진하겠다는 것이다. 이 제도는 기술혁신형 중소기업을 M&A 할 때 해당 기업의 기술가치금액의 10%를 세액 공제해 주는 혜택이다. 현행 기술가치금액은 양도가액에서 순자산시가 130%를 뺀 금액으로 계산됐는데, 이를 순자산시가의 120%로 개정하기로 했다. 기술가치금액 인정 가격을 높여 세액공제 혜택을 더 많이 주겠다는 뜻이다.

여기에 해외 우수 기업 유치를 촉진한다. 첨단 클러스터에 입주하는 신성장·첨단·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술 관련 외국인투자기업에 현금 지원을 확대하기로 했다. 현행 현금지원 한도는 투자액의 40%, 국가전략기술의 경우 50%인데, 이 비율을 모두 50%로 통일하는 것이다. 외국인 기술자·연구원이나 재외 한인 우수인력이 유망 클러스터 내 기관에 연구원으로 근무할 때뿐 아니라 교수로 임용될 때도 세액감면 대상에 추가하기로 했다. 우수인재 비자(F-2-7) 발급 시 가점을 부여해, 지역 근무를 선호하도록 만들 방침이다.

8개 주요 지자체별 클러스터 리노베이션 구성안 모음. 추후 관계부처 협의·검토를 거쳐 구체화될 예정이다. /기획재정부 제공

◇ 지자체, 맞춤형 대학·펀드·인센티브·인프라 조성 주도

클러스터 조성 과정에서 지자체의 역할도 비중 있게 키울 전망이다. 지자체는 맞춤형 도시 계획과 연계해 클러스터 조성을 계획해야 한다. 오송 제3 산단을 예로 들면 지자체인 충북, 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 대학이 협력해 대학, 병원, 연구·창업시설, 상업·편의시설 등을 혼합 배치하는 것을 추진하는 식이다.

지자체 유휴부지를 활용해 클러스터 내 기업·대학을 적극 유치하고, 지방세 감면 등 지자체 자체 인센티브를 적극 제공하기로도 했다. 예로 오송은 KAIST 바이오메디컬 캠퍼스 조성을, 송도는 연세대 K-NIBRT(한국형 국립바이오공정교육연구소)·바이오융합대학원 등 입주를, 대구는 공유 캠퍼스 공간을 만들어 지역대학 의료산업 관련 학위 과정을 운영하는 등의 대학 유치 계획을 하고 있다.

자금 지원을 확대하기 위해, 지자체·지역금융기관·지역기업이 공동 출자하는 클러스터별 특화펀드도 조성한다. 예로 서울은 2026년까지 ‘서울비전 2030 펀드’ 5조원을 조성해, 올해 홍릉 바이오클러스터 내 스타트업에 30억원 이상 투자할 계획이다. 대전도 ‘연구개발특구펀드’를 2025년까지 2300억원 규모로 조성한다. 부산과 광주는 각각 2026년까지 4000억원, 2025년까지 5000억원의 자체 펀드를 조성하기로 계획했다.

이 밖에 지자체 주도로 클러스터 내 기숙사·사택을 비롯해 상업·문화시설을 짓고, 지역 클러스터와 주변 도심을 연결하는 교통수단을 확충하는 등 정주 여건을 개선하는 데 주력하기로 했다. 인재를 지역으로 끌어모으기 위해 인프라를 개선하는 작업이다.

현재 주요 지자체들은 ‘유망 클러스터 리노베이션 구상안’을 각각 만들어 둔 상태로, 정부는 추후 관계부처 협의를 통해 지원 대상을 선정하고 이를 더욱 구체화한다는 방침이다. ▲오송(청주) K-바이오 스퀘어 ▲대구 K-메디밸리 ▲송도(인천) K-바이오 랩허브 ▲대덕(대전) 첨단 R&D 융복합 특구 ▲판교(성남) 테크노밸리 확장 ▲홍릉(서울) 글로벌 메디클러스터 ▲부산 창업클러스터 ▲광주 호남권 최대 창업밸리 등 8곳이 거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