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전북 정읍 산내면 능교리에서 바라본 섬진강 상류천 모습. 가뭄으로 상류천 바닥이 드러났고, 작은 지류만이 흐르고 있다. /윤희훈 기자

지난달 30일 전북 임실과 정읍을 사이에 둔 옥정호의 모습은 초췌함 그 자체였다. 이곳은 국내 최대 평야인 호남평야의 물줄기인 섬진강 상류 수원지다. 물이 고여있어야 할 곳엔 풀만 무성했다. 실개천 같은 작은 물줄기만이 졸졸졸 흐르며, 이곳이 본래 물길이라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려줄 뿐이었다. 산 속에 자리한 넓은 호수인 옥정호는 안개가 자주 끼어 ‘물안개길’이라는 도로명을 갖고 있다. 하지만 작년부터 이어진 가뭄은 공중의 습기를 빼앗았다. 안개는 자취를 감췄고, 도로엔 흙먼지만 날렸다.

호남 땅이 메말랐다. 오랜 가뭄에 국내에서 저수용량이 6번째로 큰 섬진강댐의 저수율은 20%선이 붕괴됐다. 총 저수량이 4억6600만톤에 이르는 대규모 댐이지만, 현재 저수량은 8900만톤에 불과하다. 섬진강댐은 1년에 4억3000만톤의 물을 흘려보낸다. 일 평균 120만톤이다. 현재 저수량이 70일치밖에 안된다는 얘기다.

섬진강댐의 평상시 저수위는 해발 197.7m를 유지한다. 현재는 해발 176.7m다. 정상 수위보다 21m 낮은 수준이다. 저수율 위기 경보는 최고 등급인 ‘심각’ 단계 수준이 발령됐다.

지금보다 수위가 1.4m 내려가면 일제시대인 1928년에 지은 댐 ‘운암제’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만약 수위가 해발154m, 지금보다 20m 더 내려가면 댐의 역할은 멈춘다. 문형관 한국수자원공사(K-water) 섬진강댐지사 차장은 “호남지역에 물 공급이 중단되는 그야말로 국가 위기 사태”라며 “6월 이후 장마철에 비가 많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오랜 가뭄으로 섬진강댐의 저수량이 평상시 대비 20% 이하로 줄었다. 평상시엔 측면의 흙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물이 채워지지만, 현재는 수면이 정상시 대비 20m 아래로 내려간 상태다. /윤희훈 기자

섬진강댐의 물줄기는 세 곳으로 흐른다. 운암취수구에선 동진강과 낙양보를 거쳐 김제로, 칠보취수구에선 부안쪽으로 물이 흐른다. 이 두 곳의 취수구에서 나가는 물은 호남평야의 농업용수로 쓰인다. 본댐에서 방류되는 물은 남원을 지나 순천으로 흐르며 생활·공업용수로 사용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고, 윗물이 흘러야 아랫물도 흐른다. 물줄기가 멈추면서 하류에는 물 비상이 걸렸다. 당장 모내기철 논에 물을 대야 할 저수지부터 위기 신호가 들어왔다.

급한대로 강 하구의 모든 수문을 닫았다. 아까운 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수문 아래 하류천의 물이 끊긴 강바닥은 앙상한 모습을 드러냈다.

수문을 닫은 지점은 임시 저수지가 됐다. 농업용수를 관리하는 한국농어촌공사는 이 곳에서 물을 끌어다 논 주변 저수지에 물을 채우고 있다. 지난주까지 부안 청호저수지에 물을 채웠고, 지금은 부안 고마저수지에 물을 대고 있다.

당장 쓸 물은 일단 채운 상태지만, 4월부터 시작하는 이앙기가 문제다. 현재 벼를 심을 논들은 대부분 작년에 추수를 하고 남은 상태로 있다. 일부 논에는 초록색 보리가 심어져 있지만 그리 많진 않다. 농가들은 4월 말 이앙기를 10여일 앞두고 서래질(땅을 일궈 굳은 땅을 부드럽게 하는 작업)을 한 후 논에 물을 가두기 시작한다고 농어촌공사 관계자는 설명했다.

이 때부터가 본격적으로 농업용수가 사용되는 시점이다. 김제에서 벼농사를 짓는 박모씨는 “모판을 옮기려면 논에 물을 채워야 하는데, 비가 안오니 너무 걱정”이라며 “홍수보다 가뭄이 더 무섭다는 말이 진짜”라고 했다.

전북 부안 동진면의 하장갑문이 내려가 수로를 막고 있다. 한국농어촌공사 전북지역본부는 수문을 막아 확보한 물을 인근 저수지로 옮기며 이앙기 물 확보에 나섰다. /윤희훈 기자

한국농어촌공사 전북지역본부는 호남평야 일대 물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금강과 부안댐 용수로 1500만톤을 공급하고, 배수로 퇴수를 다시 양수해 1500만톤을 공급하는 이앙기 물 공급 대책을 세운 상태다.

농가에 대한 물 절약 캠페인도 벌이고 있다. 가장 큰 숙제는 ‘아전인수’(자기 논에만 물 대기)를 막는 것이다. 평상시 모내기철엔 논에 시원한 물을 주겠다며 물꼬를 닫지 않고, 새물을 계속 흘려 보내는 농가들이 더러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물이 부족한 상태에서 수로 위쪽에 위치한 논 주인이 그렇게 해버리면, 아래쪽에 위치한 논까지 갈 물이 부족하게 된다고 한다.

농어촌공사 직원들은 농가 한 곳 한 곳을 찾으며 물 절약 방안 유인물을 전달하고, 협조를 당부하는 중이다. 정읍에서 밭작물을 관리하던 이모씨는 “비가 좀 와야 쓴디, 이리 가물어서야 올해 농사를 제대로 할 수 있으랑가 모르겄당게”라며 “그래도 어떻게든 저수지는 채웠능게, 모내기는 하겄는디. 논농사가 워낙 물이 많이 들어가는지라, 비가 쪼까 시원하게 와야하지 않겄소”라고 말했다.

전북 지역은 농업용수가 문제라면 아래 광주·순천 등 전남 지역은 생활용수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전남 지역 주요 상수원인 주암호와 동복호 역시 현재 저수율이 20% 아래로 떨어진 상태다. 가뭄이 지속될 경우, 광주 등 대도시에서도 제한급수를 실시해야 할 정도다.

광주·전남 지방은 그동안 섬진강물을 생활용수로 사용하고, 영산강물은 농업용수로 활용해왔다. 하지만 최근 가뭄으로 섬진강물이 부족하자, 영산강물도 생활용수로 활용 중이다.

환경부에 따르면 댐 용수 비축과 타용도의 용수를 생·공용수로 전환해 1억2000만톤의 용수를 확보한 상태다. 영산강 하천수를 광주 용연정수장에 공급하는 비상도수관로도 설치해 3월 초부터 가동 중이다. 생활용수 절감을 위한 ‘자율절수 수요조정제도’도 운영 중이다. 이 제도는 물 사용량을 줄인 지자체에 광역 수도요금을 감면해 줘 절수를 유도하는 방안이다.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수문을 닫으면서 하장갑문 아래로 흐르는 고부천의 바닥이 드러나 있다. /윤희훈 기자

이미 도서지역인 완도나 신안에선 제한급수가 시행 중이다. 현재 완도 대부분의 섬에서는 2일 급수 6일 단수 중이다. 이틀동안 받은 물을 단수되는 6일동안 나눠서 써야한다는 얘기다. 완도에서 전복 양식을 하는 이현씨는 “읍내 지역은 그나마 괜찮은데, 노화나 보길도, 청산도, 금일도 등 섬 지역은 가뭄 상황이 심각하다”면서 “물이 없어 공용 화장실 사용을 막았는데, 인분 처리가 안돼 냄새가 심하다”고 했다. 이씨는 “집집마다 파란색 대형 물탱크를 구해다가 급수를 받아 쓰고 있다. 식수는 사서 마시고 있는데, 물이 부족해 제대로 씻기도 어렵다”며 “섬 주민들에게 물을 공급하던 저수지는 모두 말랐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신안 지역에 거주하는 김모씨는 “비가 안와도 너무 안왔다”면서 “쓸 물이 없어 너무나 불편하다. 그나마 급수차가 수시로 드나들며 물을 채워주긴 하는데, 양이 제한적이니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실제로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광주·전남 지역의 최근 1년(2022년 2월~2023년 1월) 강수량은 896.3㎜로 평년의 64.6% 수준에 불과했다. 1973년 이후 가장 적은 강수량이다.

김용재 한국농어촌공사 전북지역본부 수자원관리부장은 “수원지가 없는 도서지역은 가뭄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며 “물을 받아서 쓰는 것은 기본이고 설거지나 세탁을 한 물을 화장실 하수로 다시 쓰는 게 일상이다. 사는 게 이러니 농사를 걱정할 처지가 아니다”라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3월 31일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조절지댐을 방문, 가뭄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정부도 대책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3월 31일 전남 순천 주안댐을 방문해 가뭄 상황을 점검하고, 가뭄에 대한 총력 대응을 지시했다. 윤 대통령은 환경부와 관계부처에 “지역 간 댐과 하천의 물길을 연결해 시급한 지역에 우선 공급하라”면서 “제한급수로 고통받는 섬 지역은 해수 담수화 선박 운용 등 비상 급수 대책을 확충해 주민의 고통을 덜어드려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농업을 총괄하는 농림축산식품부는 현재 가뭄대책비로 118억원을 확보해 지방자치단체에 내려보내 양수원 발굴에 나설 계획이다. 다만 물줄기가 마른 상황에 재정을 들여 관정을 뚫는다고 물이 나올지 기대하긴 어려운 상황이다. 전한영 농식품부 식량정책관은 “겨울 밭작물은 물이 많이 들지 않아 지금까진 괜찮았지만, 물이 많이 들어가는 논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4월부터가 문제”라고 말했다.

농식품부는 가뭄대책비 외에도 올해 2822억원을 투입해 경기, 충북, 충남, 전남, 경남 등 5개 지자체에 8개 농촌용수개발사업을 진행한다. 이 사업은 가뭄상습지역에 저수지, 양수장, 용수로 등 수리 시설을 설치해 농업·생활·환경용수 등 다목적 용수를 공급하는 사업이다. 수리 시설이 부족한 섬 지역에서는 지하수 활용도를 높이는 ‘지하수 저류댐’을 늘리는 방안을 환경부가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기획재정부도 지난달 28일 발표한 ‘2024년 예산안 편성지침’에서 “물 투자는 가뭄 수해 등 기후 위기 대응에 중점을 두겠다”며 환경 분야 핵심 과제로 물 확보를 꼽았다. 기재부 관계자는 “기후변화로 인한 가뭄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수리시설 확보 및 담수화 시설 확대 등 다양한 방안을 예산에 반영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