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주에 소재한 정부양곡창고에 800㎏ 쌀 포대 수백개가 쌓여 있다. /김민정 기자

지난달 28일 오후 충북 청주에 소재한 정부양곡창고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특유의 묵은 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눈 앞엔 쌀이 가득 담긴 톤백이 장성처럼 쌓여 있었다. 성인 남성 어깨 높이의 톤백 하나의 중량은 800㎏이다.

약 1000㎡(300평) 면적의 창고에는 800㎏들이 톤백이 천개 이상 보관돼 있다. 이 창고에만 보관된 양이 900t(톤) 규모에 달한다고 한다. 대부분 2021년 10월 생산된 쌀들로, 창고에 들어온 지 2년 차에 접어든 쌀이다. 톤백 안의 쌀은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백미 상태가 아닌 낟알 상태로 보관 중이다. 낟알 상태가 장기 보관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낟알의 껍질을 두겹 벗겨내면 우리가 아는 백미가 된다.

7일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전국 양곡창고에 쌀들이 쌓여만 가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과잉 공급으로 인한 쌀값 폭락을 막기 위해 90만t을 매입해 격리했다. 정부가 매년 공공비축미로 구입하는 물량 45만t에 추가적으로 45만t을 격리한 것이다. 이는 예상 생산량의 23.3%에 달하는 역대 최대 규모다.

이렇게 들여온 쌀을 보관하는 비용은 공짜가 아니다. 정부는 쌀 900t을 보관하는 비용으로 민간업체인 장원산업에 매달 700만원 이상을 지급한다. 보관료는 쌀이 많을수록 늘어난다. 300평 규모 창고에 쌀을 가득 보관할 경우 1000만원까지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냉동시설을 갖춘 저온창고의 경우 보관료가 더 비싸다.

쌀 1만톤을 1년 동안 보관하는 비용만 15억원이다. 구매비는 별도다. 지난해 정부가 사들인 90만t으로 환산하면 보관비만 1년에 1350억원이 소요된다는 얘기다. 보관하는 쌀의 양이 많을수록 비용은 늘어난다. 창고를 새로 만들어야 할 경우, 부수적인 시설 비용도 발생한다.

과잉 생산된 쌀에 대해 정부가 의무 매입하도록 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입법될 경우, 창고로 향하는 쌀의 양은 더 늘어나게 된다. 쌀을 시장에서 격리하기 위한 매입 비용에, 창고에 보관하는 비용까지 국민이 낸 세금이 줄줄 새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충북 청주에 소재한 정부양곡창고에 800㎏ 쌀 포대가 줄지어 있다. /김민정 기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호 법안’이라며 추진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쌀 수요 대비 초과 생산량이 3% 이상이거나 수확기 쌀값이 전년 동기 대비 5% 이상 내려가면 정부가 의무적으로 쌀을 매입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쌀 과잉 생산분에 대해 정부가 ‘격리를 위해 매입할 수 있다’고 돼 있는 현행법을 ‘매입해야 한다’로 의무화한 것이 핵심이다.

여야 협의 과정에서 김진표 국회의장의 중재로 초과 생산량을 ‘3~5%’로, 가격 하락 폭을 ‘5~8%’로 늘리는 안이 검토되고 있지만, 초과 생산된 쌀을 의무적으로 매입하도록 하는 내용은 달라지지 않았다.

정부와 여당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해 ‘재정 구멍’을 키우는 법이 될 것이라고 꼬집는다. 정부가 재배 작물을 전환하는 농가에 인센티브를 주는 등 쌀 생산량 감축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쌀 매입 의무화로 농가의 소득을 보전하면 쌀 농사를 줄일 농가가 없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지난 1월 기준 정부관리양곡 재고량은 136만8000t이다. 지난해 1월 42만4000t이었는데, 작년말 수확기에 90만t을 정부가 사들이면서 재고가 급증했다. 2019년 1월 103만4000t이었던 정부관리양곡 재고량은 매해 주정용 등으로 20만t가량이 방출됐다. 2020년 80만5000t, 2021년 61만5000t, 2022년 42만4000t으로 감소했다. 하지만 2년 연속 풍작으로 쌀 생산량이 급증하고 쌀값은 급락했다.

이에 정부는 2022년 초과생산분의 2배 수준인 45만t을 1조원을 들여 추가 격리했다. 역대 최대 규모의 쌀 시장 격리 조치였다. 정부가 쌀 1만t을 시장에서 격리하는 데에는 약 267억원이 소요된다는 게 농식품부의 설명이다. ▲쌀 매입비 208억원 ▲입고·운송료 2억원 ▲3년 보관비용 45억원 ▲방출 시 가공비용 12억원 등이 들어간다고 한다.

문제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입법되면 쌀 과잉 생산 체계가 굳어지고, 격리 비용이 매년 증가한다는 점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지난해 발표한 ‘쌀 시장격리 의무화의 영향 분석’ 보고서에서 개정안이 통과되면 2022년 24만8000t 수준이던 쌀 초과생산량이 2024년 38만3000t, 2026년 48만2000t, 2028년 56만t, 2030년 64만1000t 수준으로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초과생산된 쌀을 시장에서 격리하는 비용은 2024년 8709억원을 기록한 이후 매년 1000억원씩 늘어 2030년에는 1조4042억원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했다. 2024년부터 2030년까지 7년간 들어가는 예산은 8조원을 넘어선다. 7년 동안 국민 한 명이 16만원씩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얘기다. 법이 재개정되지 않는 한 재정 누수는 2030년 이후로도 계속된다.

전문가들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쌀 소비가 감소하는 현 추세에 부합하지 않는 법이라고 지적한다. 현재 한국은 저출산·고령화로 인구감소기에 접어들었다. 고령층이 많아지면서 1인당 쌀 소비량은 감소하고 있다. 여기에 식문화 변화로 젊은 층은 밥보다 빵이나 단백질류 식사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김종인 농경연 연구위원은 “1인당 쌀 소비량은 매년 1.8%씩 감소하고 있다”며 “정부 매입으로 쌀 가격이 안정되면서 벼 재배면적 감소 폭은 줄어드는 반면, 쌀 가격 상승에 따라 1인당 소비량 감소 폭은 확대돼 쌀 수급 불균형이 악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야당 의원들은 농가 보호와 식량 안보를 위해 양곡관리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유독 쌀에만 초과 생산분에 대해 시장격리를 의무화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비판도 나온다. 최근 과잉 공급에 따른 가격이 폭락해 소비 진작을 위해 50% 할인 행사를 벌이는 한우나 작년 가을에 ‘금추’로 불리다 김장철 이후 농가에서 아예 수확을 포기한 배추 농가에는 역차별이 된다는 것이다. 농식품부에 배정된 예산의 상당 부분이 쌀 격리에 소진돼, 타 작물의 품종 개량 등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이 중단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정부는 이재명 대표에 대한 체포 동의안 후폭풍으로 2월 국회 본회의에서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처리되지 않은 데 대해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야당이 3월 국회에서 법안 처리를 벼르고 있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앞서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2월 20일 국회에서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할 경우 거부권 건의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도 올해 초 농식품부 업무보고에서 양곡관리법에 대해 “무조건 정부가 매입해주는 것은 농민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부정적인 입장을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