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경기 둔화가 ‘가시화’한다고 표현했던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이달 들어서는 경기 둔화가 ‘심화’한다고 표현을 다듬었다. 수출 감소 폭 확대와 내수 회복 부진이 우리나라 경제를 더 강하게 흔들자 KDI도 진단 수위를 한층 더 부정적으로 바꾼 것이다. 다만 KDI는 통화 긴축 약화 분위기에 금융시장은 비교적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서울 종로구 관철동 거리에서 한 주류 업자가 맥주 상자를 나르고 있다. / 연합뉴스

KDI는 7일 발간한 ‘2월 경제동향’에서 “최근 우리 경제는 수출 감소 폭이 확대되고 내수 회복세도 약해지면서 경기 둔화가 심화하고 있다”고 했다. 1월 경제동향에서는 “경기 둔화가 가시화되는 모습”이라고 평가했는데, 1개월 만에 경기 상황에 관한 비관적인 톤을 키웠다.

KDI는 수출의 경우 글로벌 경기 부진이 심화하면서 주력 수출품인 반도체를 중심으로 감소 폭이 커졌다고 했다. 정규철 KDI 경제전망실장은 “중국 경기 위축으로 대중(對中) 수출이 대폭 줄었고, 미국 투자 부진이 반영되면서 대미 수출도 감소세로 전환했다”며 “이에 따라 제조업은 평균 가동률이 급락하고 생산 감소 폭이 확대되는 등 부진이 심화했다”고 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이달 1일 발표한 ‘1월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우리나라 수출은 전년 동월 대비 16.6% 감소한 462억7000만달러를 기록했다. 4개월 연속 감소이자 2020년 5월(-23.7%) 이후 2년 10개월 만의 월간 최대 감소 폭이다. 특히 반도체 수출 위축이 도드라졌다. 지난달 반도체 수출액은 1년 전보다 44.5% 감소한 60억달러로 집계됐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 12월(-49.9%) 이후 14년 1개월 만의 최대 낙폭이다.

지역별로 보면 대중 수출액이 91억7000만달러로 1년 전보다 31.4% 줄었다. 대미 수출액은 6.1% 감소한 80억5000만달러를 기록했다. 가장 큰 수출 감소세를 기록한 중국은 반도체 업황 악화와도 연관돼 있다. 한국의 반도체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기준 40.3%에 달한다. 대중 반도체 수출은 작년 9월까지 16개월 연속 40억달러대 수출을 유지하다가 10월부터 확 고꾸라졌다.

그래픽=손민균

KDI는 고물가·고금리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수출 부진의 영향이 맞물리면서 내수 회복세도 약해졌다고 진단했다. KDI는 “공공요금 인상에 주로 기인해 소비자물가 상승세가 확대했고, 기조적 물가 흐름이 반영된 근원물가 상승률도 높은 수준을 지속했다”며 “수출 감소에 따른 제조업 부진으로 설비투자 증가 폭이 축소됐고, 건설투자는 고금리에 따른 주택경기 하락으로 부진한 흐름을 보였다”고 분석했다.

지난 2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3년 1월 소비자물가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우리나라 소비자물가지수는 110.11(2020년=100)로 전년 동월 대비 5.2% 올랐다. 작년 12월 상승률인 5.0%보다 0.2%포인트(p) 확대된 수치다. 소비자물가 상승 폭이 전월보다 확대된 건 3개월 만이다. 김보경 통계청 경제동향통계심의관은 1월 물가 상승 폭이 커진 배경에 대해 “전기료 등 공공요금 인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1월 전기·가스·수도는 1년 전보다 28.3% 급등했다.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2010년 이후 최고치다. 특히 올해 1월 물가 상승률의 경우 작년 4·7·10월에 이어 지난달까지 전기요금이 오른 영향이 컸다는 게 통계청 분석이다.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에 대한 전기·가스·수도의 기여도는 작년 7월 0.49%p, 10월 0.77%p, 지난달 0.94%p로 점점 확대되고 있다.

물가의 기조적 흐름을 보여주는 근원물가(농산물 및 석유류 제외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5.0% 상승했다. 전월(4.8%)보다 상승 폭이 커진 것은 물론 2009년 2월(5.2%) 이후 14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근원물가는 주로 수요의 영향을 받는 품목만 따로 모은 것으로, 물가 상승의 기조적 흐름을 보여주는 대표적 지표다. 근원물가가 꾸준히 오른다는 건 인플레이션 압력이 국제유가의 영향을 크게 받는 석유제품 등 일부 품목에 국한하지 않고 전반적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래픽=손민균

KDI는 소비 회복세가 약화한 가운데 고용 증가세도 둔화 추세라고 했다. 통계청의 ‘2022년 12월 및 연간 고용동향’에 따르면 취업자 증가 폭은 7개월째 감소 중이다. 취업자 증가 폭은 2022년 5월 93만5000명을 기록한 뒤 6월 84만1000명, 7월 82만6000명, 8월 80만7000명, 9월, 70만7000명, 10월 67만7000명, 11월 62만6000명, 12월 50만9000명 등으로 둔화세를 보이고 있다.

다만 KDI는 “경기종합지수가 급락했고 경제 심리지수도 낮은 수준을 지속했으나, 대내외 통화 긴축 강화에 대한 기대가 약화하면서 금융시장은 비교적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고 했다. 앞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1월 31일~2월 1일(현지시각) 열린 2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기준금리를 0.25%p 인상했다. 시장에서는 “연준이 물가 상승세 둔화 흐름과 경기 침체 우려를 고려해 금리 인상 속도를 늦췄다”는 분석이 나왔다.

실제로 회의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디스인플레이션(disinflation·물가 상승 둔화)’이라는 단어를 10회 이상 쓰기도 했다. 파월 의장은 “지금은 디스인플레이션 초기 단계”라며 재화를 중심으로 물가 상승률이 정점을 지나 꺾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여전히 물가 수준이 높아 지속적인 금리 인상(ongoing increases)이 적절하다면서도, 과도하게 긴축할 의도는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