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이 생산하고서 판매되지 않는 제품의 비율이 1998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만큼이나 치솟은 것으로 나타났다. 제품이 시장에서 판매되는 것 대비 창고에 재고로 쌓이는 비율이 120%대로 높아진 건데, 이런 수준이 넉달째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한창이던 2020년 5월 한달 지금보다 소폭 높은 수준으로 ‘반짝’ 재고율이 튀어 오른 적은 있었지만, 이번처럼 추세로 자리 잡은 것은 24년 만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혹한기를 지나는 반도체 재고 증가가 이 같은 흐름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2년 만의 ‘수출 감소세 전환’을 이끈 반도체 수출 급감 등 지표 곳곳에서 악화한 반도체 업황의 여파가 관찰되는 모습이다. 심각성을 인지한 정부가 반도체 산업 활성화 방안 등을 내놓았지만,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연구원들이 반도체 패턴 웨이퍼를 살피고 있다. /뉴스1

◇ 재고율 4개월째 120%…2000년대 들어 못 보던 추이

6일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지난 9월 제조업의 출하 대비 재고 비율 지수(재고율)는 지난달보다 0.5%포인트(p) 상승한 123.4%를 기록했다. 재고율 120%대 기록은 ▲6월 124.2% ▲7월 124.3% ▲8월 122.9%에 이어 4개월째다. 코로나 사태가 한창이던 2020년 5월 기록한 127.5%보다는 다소 낮은 수준이지만, 당시엔 그달에만 반짝 치솟았다가 이내 100~110%대로 내려왔다는 점에서 이번과 다르다.

재고율이 120%대로 치솟은 것은 물론 이것이 수개월 연속되는 흐름을 보이는 것은 IMF 위기 때인 1998년 이후 24년 만이다. 위기 당시 140%까지도 뚫었던 재고율은 1998년 9월(122.9%)까지 120% 이상을 유지하다가 서서히 내려왔고, 1999년 초부터는 출하지수가 재고지수보다 높은 현상(100% 아래)이 상당 기간 이어졌다. 2015년쯤 100%대에서 등락을 거듭하며 우상향하더니, 2017년 10월 이후엔 재고율이 100% 아래로 떨어진 적 없었다. 그런데 상승 흐름이 최근 들어 더욱 심화한 것이다.

그래픽=이은현

재고지수 자체도 고공행진이다. 계절 요인을 고려해 조정한 제조업 재고지수(2015년=100)는 ▲7월 130.9 ▲8월 130.1 ▲9월 130.3을 나타내 사상 처음으로 3개월 연속 130대를 기록 중이다. 이런 흐름은 특히나 반도체의 영향을 크게 받는 모양새다. 반도체 재고지수는 지난 9월 237.1을 기록해 역대 최대 수준을 기록했다. 과거에 비해 반도체 생산 규모가 확대됐기에 이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나, 최근엔 업황의 악화가 재고지수 상승을 빠르게 부추긴 모습이다.

아직 재고율 집계 중인 10월 역시 상황이 나아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 1일 발표한 ‘2022년 10월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우리나라 무역수지는 1997년 이후 처음으로 7개월째 적자를 기록했고, 수출 역시 24개월 만에 ‘마이너스(-)’로 전환했다. 특히나 반도체 수출이 전년 대비 17.4% 급감하면서, 전체 수출 실적을 끌어내렸다.

그래픽=이은현

◇ ‘韓 경쟁력 최하위’ 곳곳 반도체 위기 경고음…정부 대책 효과 볼까

글로벌 수요 부진과 메모리반도체 가격 하락세 등이 얽혀 접어들게 된 ‘반도체 혹한기’ 상황이 경제 지표 곳곳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모습이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국가 경쟁력이 부진하다는 경고음마저 울리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 경쟁력을 바탕으로 현재 세계시장 점유율은 최상 수준이지만, 종합 경쟁력을 따지면 하위권이라는 지적이다.

산업연구원(KIET)이 최근 발표한 ‘반도체 산업의 가치사슬별 경쟁력 진단과 정책 방향’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종합 경쟁력은 6개 조사 대상국 가운데 5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96)이 가장 높았고 대만(79), 일본(78), 중국(74) 그리고 한국(71), 유럽연합(66) 순을 보인 것이다. 메모리반도체에서는 높은 경쟁력이 있으나, 시스템 반도체에서는 열위에 놓여 있다고 평가되면서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비상경제장관회의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정부 역시 이런 심각성을 인지하고 최근 반도체 등을 포함한 우리 주력산업 활성화 방안을 내놓은 바 있다. 1조원 재정을 투입해 반도체 전문 인력을 육성하고, 차세대 반도체, 팹리스(설계전문기업), 첨단패키징 등 관련 유망기술 연구개발(R&D) 지원 등에 나선다는 것이다. 3000억원 규모의 ‘반도체 생태계 펀드’ 조성, 세제 지원 확대, 주력산업 국가산업단지 조성 등의 내용도 반도체 산업 활성화를 위한 과제로 제시됐다.

하지만 일각에선 이런 지원 방안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반도체 산업의) 가치사슬 전반을 강화하고 경쟁열위에 있는 시스템반도체 분야의 육성을 위한 차별화된 전략이 필요하다”면서 “메모리 반도체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평택, 용인 등 국내 사업장을 중심으로 K-반도체 클러스터를 만드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