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대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강(强)달러 현상이 미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에게 큰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전 세계를 강타한 강달러 현상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공격적인 금리인상으로 미 달러화가 초강세를 이어가면서 주요국 통화 가치가 급락하고, 채권금리가 뛰는 등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는 상황을 우려한 것이다. 미 연준은 최근 물가 안정을 목표로 3차례 연속 기준금리를 0.75%포인트(p) 올리는 ‘자이언트 스텝’을 단행했고, 달러화 가치는 20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미국 입장에서는 달러화 강세가 수입 물가를 낮추기 때문에 인플레이션 억제에 도움이 된다. 반대로 신흥국에서는 통화 가치 하락이 수입 물가를 밀어올려 인플레이션을 부추기고, 외국인 자금 유출 압력이 커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이에 각국 중앙은행은 자국 통화 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기준금리 인상에 속도를 내는 ‘역(逆)환율 전쟁’에 돌입했다.

문제는 주요국이 경쟁적으로 금리를 끌어올리면서 글로벌 경기 침체 위험도 커졌다는 점이다. 지난 4일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연준의 금리 인상이 개발도상국에 심각한 피해를 주고, 세계 경제를 침체에 빠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CNN은 “달러화 초강세의 유일한 수혜자는 해외 여행을 가거나 수입 제품을 구매하는 미국 소비자”라고 평가했다.

일러스트=손민균

◇ 연준 2인자 “강달러는 미국 수입물가 낮춰…조기 금리인상 종료 없다”

미국이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인플레이션을 수출하고, 신흥국의 채무 위기를 불러와 경기 침체 위험을 키운다는 지적에도 연준을 비롯한 미 경제학계는 지금의 고강도 긴축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미국이 하루빨리 인플레이션을 잡지 못해 소비와 고용이 악화되면 세계 경제가 더 큰 충격에 빠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세브넴 칼레믈리-오즈칸 미 메릴랜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연준이 다른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금리 인상을 제한하거나 중단하면 더 큰 재앙이 올 수 있다”고 말했다. 통화정책의 일관성이 결여되면 연준에 대한 시장 신뢰가 무너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연준이 인플레이션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미국이 세계 불안의 진원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연준 2인자인 라엘 브레이너드 부의장은 이달 1일 열린 한 행사에서 “연준이 조기에 금리 인상을 종료할 가능성은 없다”고 강조했다. 연준의 긴축이 심각한 경기 침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일각의 주장에 반박하는 차원에서 이같은 발언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인플레이션은 미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매우 높은 수준이며, 추가적인 물가 상승 충격의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며 당분간 금리인상 기조를 유지하겠다고 시사했다.

브레이너드 부의장은 “달러화 강세는 미국 수입 물가를 낮춘다”며 “다만 일부 다른 국가들은 통화 가치가 하락해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졌을 것이기 때문에 추가 긴축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달러화 강세에 따른 미국의 인플레이션 수출은 불가피하며, 주요국 중앙은행이 자국 상황에 맞춰 알아서 대응해야 한다는 취지다. 연준이 물가를 잡기 전까지 일방적인 달러화 독주 현상인 ‘킹달러’(King Dollar)를 용인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라엘 브레이너드 연준 부의장. ⓒ News1

◇ 연준 늑장 대응도 문제 키워…“무역적자보다 고물가 대응 시급”

미국은 지난 1985년 영국, 일본, 프랑스, 독일과 달러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끌어내리는 ‘플라자 합의’를 통해 시장에 개입했다. 당시 미국이 플라자 합의를 주도한 이유는 강달러로 악화된 무역수지 적자를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다만 지금은 무역수지 적자보다 인플레이션 억제가 더 시급한 상황이라 ‘제2의 플라자 합의’가 체결될 가능성은 낮다는 게 시장의 지배적인 의견이다.

연준이 뒤늦게 인플레이션의 심각성을 깨닫고 가파른 금리인상으로 대응하는 바람에 강달러 현상이 촉발한 경기 침체 위협을 손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나온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지난해까지 “인플레이션은 일시적(transitory)’라는 입장을 고수하다가 올해 3월에야 금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가팔라진 뒤에야 “(인플레이션을) 과소평가했다”면서 입장을 선회했다.

미국의 물가상승률이 41년 만에 최고치인 9%대까지 치솟은 6월부터 연준은 금리 인상폭을 0.75%p로 확대했고, 이달까지 4회 연속 자이언트 스텝을 밟을 것으로 예상된다. 파월 의장은 지난 8월 잭슨홀 연설에서 “인플레이션을 2% 목표로 되돌리기 전까지 금리인상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세계 최대 채권 운용사인 핌코의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모하메드 엘-에리언은 “인플레이션에 뒤늦게 대응한 연준의 모습은 선진국이 아니라 제도가 부실한 개발도상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라며 연준이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고 꼬집었다.

미국 달러화. / 뉴스1

◇ “당분간 킹달러 지속…달러인덱스 연말에 120 간다”

연준이 내년까지 고금리 기조를 유지하면서 달러화 가치도 추가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는 지난해 95.7에서 최근 최대 114선까지 뛰었다. 올해 들어서만 약 16% 올랐다. 일각에서는 지금과 같은 추세가 지속된다면 달러인덱스가 2001년 이후 처음으로 고점인 120을 돌파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 ING는 “연준이 긴축 강도를 높이면서 연말에는 달러인덱스가 120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투자전문매체 인베스팅닷컴도 “(여러 대외 리스크가 겹치는) 극단적인 시나리오에서는 달러인덱스가 빠르면 연말에 2001년 고점인 120선까지 도달할 수 있지만, 향후 6개월 내 120에 근접한 수준까지 오르는 전망이 보다 합리적”이라고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