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13년 6개월 만에 처음으로 장중 1430원을 돌파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인상 충격과 영국 파운드화 가치 급락이 겹치면서 강(强)달러 흐름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본격적인 환율 방어에 나섰지만, 원화 약세 재료가 워낙 강해 원·달러 환율 상승 흐름이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는 모습이다.

◇ 원·달러 환율, 장중 1430원 돌파…하루 만에 10원 급등

26일 서울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9.7원 오른 1419원에 개장해 곧바로 1420원을 넘어섰다. 이후 오전 11시 20분쯤에는 장중 한때 1430원도 뚫었다. 환율이 장중 1430원대로 올라선 것은 2009년 3월17일(고가 1436원) 이후 약 13년 6개월 만이다.

26일 오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원·달러 환율은 지난 22일 연준이 기준금리를 한 번에 0.75%포인트(p) 인상하는 ‘자이언트 스텝’을 3차례 연속 단행한 이후로 ‘심리적 저항선’으로 불리는 1400원을 넘어섰다. 연준은 당시 공개한 점도표를 통해 내년 최종금리를 4.6%로 제시했다. 현재 미국의 정책금리는 3.00~3.25%인데, 앞으로 금리를 1.35%p 추가 인상할 수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연준이 내년까지 금리인상에 속도를 낼 것이란 전망에 안전자산으로 여겨지는 미 달러화에 자금이 몰렸고, 이에 따라 달러화 가치도 치솟았다.

이날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는 113선으로 뛰어 올랐다. 전 거래일보다 0.52% 상승한 113.555를 기록 중이다. 이는 2002년 5월 이후 약 20년 4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 英 파운드화 급락에 달러화 강세 가속

최근 유로화, 위안화, 엔화, 파운드화 등 주요국 통화 가치가 일제히 하락한 점도 달러화 강세를 부채질하고, 원화 가치를 끌어내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난 주말 리즈 트러스 신임 총리가 이끄는 영국 정부가 약 70조원 규모의 감세 정책을 발표한 여파로 파운드화 가치는 37년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지난 23일 달러에 대한 파운드화 가치는 1985년 이후 최저치인 파운드당 1.0859달러까지 급락했다.

이로 인해 불붙은 파운드화 기피 심리가 달러 가치를 더 밀어올렸다. 시장에서는 유로화에 이어 파운드화 마저 ‘패리티’(1달러=1파운드)가 깨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21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77차 유엔총회에서 연설하는 트러스 총리.

유로화는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가 촉발한 러시아의 천연가스 공급 중단과 이에 따른 유럽 에너지 위기 악화 우려에 급락했다. 유로화 대비 달러화 가치는 지난 23일 유로당 0.9690달러를 나타냈다.

중국 위안화와 일본 엔화도 연일 약세다. 중국의 경기 침체 불안이 커지면서 위안화는 이날 달러당 7위안을 넘어섰다. 이는 2년 만에 최저치다. 중국 인민은행은 이날 위안화의 달러 대비 기준 환율을 전 거래일보다 0.0378위안 올린 7.0298위안으로 고시했다.

엔화 가치도 24년 만에 최저 수준까지 추락했다. 일본 중앙은행은 주요국의 금리인상 행보에 동조하지 않고 경기 부양을 위해 나홀로 ‘마이너스 금리’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위원은 “정부의 환율 1400원 방어 의지에도 불구하고 킹달러(달러화 초강세) 현상, 파운드화 급락과 위안화 약세, 국내 주식시장 조정 등 일방적인 원화 약세 요인이 두드러지면서 원·달러 환율이 급등했다”며 “환율이 예상보다 빨리 1450원에 근접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예비비 지출 승인과 관련, 정부 측 인사말을 하고 있다.

◇ 다급해진 정부, ‘환율 방어’에 총력

정부가 환율 안정을 목표로 전방위적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지만, 원화 약세 재료가 워낙 많아 크게 힘을 쓰지 못하는 모습이다. 앞서 한국은행과 국민연금이 100억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를 체결한 데 이어 정부가 조선사 선물환 매도 지원 방안을 내놓았다. ‘서학개미’들이 해외 주식을 팔면 혜택을 주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전날 KBS ‘일요진단’에 출연해 “조선사의 대금 수주가 장기간에 걸쳐서 하는데, 선물환 매도 수요가 시장에서 소화가 잘 안되고 있다”며 “일반 시중은행과 국책은행에서 소화할 수 있도록 여러 장치를 마련하고, 외평기금을 활용해 조선사 선물환을 직접 매입해서 그 수요를 줄여주고 시중에 달러 공급을 확대하는 조치를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이날 오전 “원·달러 환율 상승이 수입물가 상승을 통해 국내 물가에 추가적인 상방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에 유의하겠다”면서 “외환시장에서 쏠림 현상이 심화돼 원·달러 환율이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과 과도하게 괴리될 경우 준비된 컨틴전시 플랜(contingency plan·비상계획)에 따라 시장 안정화 조치를 적기에 시행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