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30여 년 만에 가장 공격적인 금리 인상을 단행하면서 달러 가치가 급상승했다. 이는 전 세계 통화와 중앙은행에 도전장을 던졌다.”

이달 23일(현지시각) 미국 블룸버그는 연준의 3연속 ‘자이언트 스텝(기준금리를 한 번에 0.75%p 인상)’ 이후 심화 조짐을 보이는 글로벌 ‘역(逆)환율 전쟁(reverse currency wars)’을 소개하며 이렇게 보도했다. 연준은 올해 들어 지금까지 기준금리를 300bp(1bp=0.01%p)나 올렸다. 최근 세 번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는 금리를 연거푸 75bp씩 인상했다. 고(高)물가를 잡겠다는 이유에서다.

연준의 공격적인 긴축 행보가 만든 킹달러(King Dollar·달러화 강세) 환경은 미국 내 수입 물가를 낮추고 유가 상승을 억제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미국으로선 ‘달러만 강세’ 상황이 꽤 괜찮은 카드인 셈이다. 이는 한국 일각에서 제기되는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 가능성이 낮은 이유이기도 하다. 통화스와프는 달러를 시장에 푸는 개념이라 연준의 긴축 행보에 배치된다.

문제는 킹달러가 미국 내부적으로는 유리할지 몰라도 다른 나라 입장에서는 자금 유출과 금융시장 불안정성을 증폭시키는 요인이라는 점이다. 미국이 수출한 인플레이션 폭탄을 마주한 각국 중앙은행은 자국 통화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앞다퉈 금리 인상에 뛰어드는 역환율 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 언론은 달러만 강세인 상황에 대해 “다른 나라뿐 아니라 미국 기업의 해외 매출도 타격을 입을 것”이라며 우려를 나타낸다.

행인들이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에 있는 나스닥 마켓사이트 앞을 지나가고 있다. / AP 연합뉴스

◇ 미국, 인플레 수출로 유리한 내수 환경 조성

25일 통화 당국에 따르면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DXY)는 지난 22일(현지시각) 전 거래일 대비 0.65% 상승한 111.067에 마감했다. 111.150을 기록한 2002년 6월 13일 이후 20년 3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치다. 23일 서울 외환시장에서는 달러화 대비 원화 환율이 1409.3원에 장을 마쳤다. 전장(1409.7원)보다는 0.4원 내려갔지만, 여전히 1400원을 웃도는 수준이다.

미 달러의 ‘일방적’ 강세가 만든 풍경이다. 이런 장면은 한국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지난해 1유로당 1.2달러 수준이던 유로화도 현재는 달러와 등가로 교환된다. 유로화 가치가 1년 새 20%가량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만큼 미국 내 수입품 가격은 저렴해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지난 5일(현지시각) “미국 내 인플레이션에도 기록적인 달러 강세 덕에 미국인의 구매력이 높아졌다”고 보도할 수 있던 배경이다. 달러만 강세인 상태에서는 미국인의 해외 여행 부담도 줄어든다.

달러는 미국 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대폭 늘고 실업자가 증가하며 경제가 급격히 얼어붙은 2020년만 해도 약세를 보였다. 미 정부가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극복을 위해 대규모 경기 부양책을 내놓고 유동성 공급을 확대해서다. 분위기는 작년부터 서서히 바뀌었다. 넘치는 유동성을 수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글로벌 공급난 심화로 물가가 급등하자 달러도 강세로 돌아섰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국 경기 둔화 등도 킹달러 가속화에 영향을 줬다.

연준은 이달 20~21일(현지시각) 열린 9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기준금리를 기존 2.25~2.50%에서 3.00~3.25%로 상향 조정했다. 점도표에 나타난 연준 위원들의 내년 금리 전망 중간값은 기존 3.8%에서 4.6%로 높아졌다. 연준이 내년까지 기준금리 인상 기조를 유지할 것이란 의미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FOMC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인플레이션이 목표치인 2%를 향해 내려간다는 확신이 들기 전에는 금리 인하를 고려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픽=이은현

◇ “킹달러에 고통” 각국 역환율 전쟁 참전

미 달러 홀로 강세인 상황이 미국 내수에는 좋을지 몰라도 다른 나라에는 고통을 준다. 각국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 대응과 자국 통화 가치 방어를 이유로 기준금리 인상에 속도를 내는 이유다. 이른바 역환율 전쟁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올해 기준금리를 올린 국가는 60곳 이상이다.

일례로 스웨덴중앙은행은 지난 20일(현지시각) 기준금리를 한 번에 1%p 올리는 ‘울트라 스텝’을 단행했다. 스웨덴이 울트라 스텝에 나선 건 1992년 물가 목표제를 시행한 이래 처음이다. 영국 영란은행은 8월에 이어 9월에도 기준금리를 0.5%p 인상했다. 두 달 연속 ‘빅 스텝’을 밟은 것이다. 현재 영국 기준금리는 2.25%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2015년부터 줄곧 마이너스 금리 수준을 유지해온 스위스도 기준금리를 0.5%까지 올렸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만 해도 주요국은 자국 통화 가치를 낮추는 ‘환율 전쟁(currency war)’에 주력했다. 통화 가치가 떨어지면 수출 기업의 가격 경쟁력과 채산성이 개선돼 경제 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실 이 ‘환율 전쟁’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2010년 기도 만테가 브라질 재무장관이 미국·일본 등 주요국 통화 정책에 항의하면서 처음 사용했다. 글로벌 외환 시장의 불문율처럼 여겨지던 이 환율 전쟁 기조는 올해 미국의 킹달러 독주로 전환점을 맞았다.

조선 DB

◇ ‘죄수의 딜레마’ 악순환 고리 우려

전문가들은 미국을 필두로 한 주요국의 통화 가치 방어 전쟁이 궁극적으로 글로벌 경제에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이코노미스트 출신인 모리스 옵스펠드 미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이달 21일 기획재정부·한국개발연구원(KDI)이 개최한 콘퍼런스에서 “각국이 경쟁적으로 통화 가치를 절상하면 인플레이션을 수출하는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옵스펠드 교수가 언급한 죄수의 딜레마는 한 국가가 금리를 인상해 자국 통화 가치를 올리면 그 나라 생산품 가격이 상승하고, 이 제품을 수입하는 다른 나라도 자국 물가 안정을 위해 금리 인상에 나서는 현상이 반복된다는 내용이다. 결국 연관된 모든 국가가 금리 인상 악순환 고리에 빠져 물가 상승과 경기 둔화라는 부작용을 만나게 된다.

그나마 선진국은 역환율 전쟁을 치를 체력이라도 있지만, 경제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신흥국은 대규모 자본 이탈이라는 후폭풍과 만날 수 있다. 신흥국 충격은 이미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올해 들어 파키스탄 통화는 달러 대비 33% 이상 평가 절하됐고, 라오스 화폐는 30% 넘게 추락했다. 부도 상태에 빠진 스리랑카는 IMF로부터 29억달러(약 4조원)를 긴급 수혈받은 상태다.

세계 경제가 촘촘하게 엮여 직·간접적으로 상호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홀로 달러 강세 질주 중인 미국 경제에도 현 상황이 나을 게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달러 강세가 미국산 제품을 비싸게 만들어 각국 지출을 늘리면 이는 결국 수요 감소와 경제 회복 둔화로 이어질 것이란 이유에서다. 달러만 강세 장기화에 지친 각국 경제가 침체에 빠지면 그 파장은 미국에까지 미칠 수밖에 없다.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달러 화폐를 점검하고 있다. / 연합뉴스

◇ ‘글로벌 긴축’ 주도하는 美 연준…전문가 “통화스와프 체결 가능성 없어”

또 미국 소비자는 만족할지 몰라도 해외 시장에서 활동하는 미국 기업은 현 상황이 반가울 리 없다. 블룸버그는 “세일즈포스·코스트코 등 미국 기업은 달러 강세에 불만이 많다. 이들 기업의 해외 수익이 달러로 환산하면 줄어들기 때문”이라며 “또 현지 통화 기준으로 미국 기업 제품의 가격이 올라 수요가 감소하기도 한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도 “이미 마이크로소프트·나이키 등의 최근 이익이 줄었다”며 “미국 이외 지역에서 매출의 60%를 만드는 애플 등 빅테크 기업도 달러 강세에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강달러 기조를 당분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허준영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상황이라는 점만 고려해도 미국이 내수 경기에 도움을 주는 달러 강세를 당장 멈출 가능성은 작다”고 했다.

허 교수는 일각에서 필요성을 제기하는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도 기대하기 힘들다고 했다. 그는 “현재 달러는 모든 통화보다 강세이고, 거의 모든 나라가 미국과 통화스와프를 맺길 원한다”며 “미국이 기축통화국도 아닌 한국과 긴축 기조를 역행하는 개념의 통화스와프를 체결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