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1층 다음은 지하 17층, 그다음은 지하 21층’

이달 26일 경북 경주 양북면 봉길리에 있는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관리 1단계 동굴처분시설. 현장 안내를 맡은 한국원자력환경공단 직원이 지하 17층 버튼을 누르며 “이런 엘리베이터는 처음 타죠?”라고 말했다. 느린 속도로 한참 내려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콘크리트 방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지하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입구에서 방호복과 안전모를 착용한 뒤 안쪽으로 들어섰다. 발밑으로 직경 23.6m, 높이 50m 크기의 거대한 원통형 구조물이 보였다. 방폐물을 보관하는 처분고(사일로·Silo)였다.

8월 26일 경북 경주 양북면 봉길리에 있는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관리 1단계 동굴처분시설 안에 방폐물을 보관하는 처분고(사일로)가 있다. / 전준범 기자

◇ 2015년부터 지하 80~130m 동굴에 보관

현장에서 만난 공단 직원이 “이곳에 총 6개의 사일로가 있다”고 설명했다. 각 사일로 위로는 방폐물을 들어 처분고 안쪽에 쌓는 역할을 하는 크레인이 설치돼 있었다. 노출 상태의 방폐물을 사일로에 그냥 집어넣는 건 아니다. 우선 방폐물을 200리터 드럼통에 담고, 이 드럼통을 다시 10cm 두께의 콘크리트 처분용기 안에 넣는다. 처분용기 하나에 드럼통 16개가 들어간다. 크레인이 테트리스 게임을 하듯 사일로 안쪽에 쌓는 게 바로 이 콘크리트 처분용기다.

정부는 해수면 아래 지하 80~130m 지점에 있는 이 1단계 동굴처분시설을 지난 2014년 6월 준공했다. 방폐물을 보관하기 시작한 건 2015년 7월부터다. 200리터 드럼통 10만개를 처분할 수 있는 이곳에는 현재 약 2만5600개의 드럼통이 쌓여있다. 언젠가 사일로가 방폐물로 가득 차면 공단은 사일로 벽과 방폐물 틈을 쇄석(암석을 인공적으로 파쇄해 얻는 콘크리트용 골재)으로 채운다.

조병조 원자력환경공단 소통협력단장은 “우리가 생활하는 지상과 지하 방폐물 사이에는 쇄석과 콘크리트 방벽, 암반, 표토층이 첩첩이 있다”며 “방사선 누출은 아예 없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조 단장의 말을 듣고 동굴 입구에서 받은 휴대용 방사선 측정기를 봤다. 화면에 ‘0밀리시버트(mSv)’란 표시가 떴다. 같은 시각 서울의 방사선량은 0.117mSv였다. 방폐장 속 방사선량이 자연 방사선량보다 적다는 의미다.

휴대용 방사선 측정기 화면에 방사선량 ‘0밀리시버트(mSv)’가 표시돼 있다. / 전준범 기자

지금까지 정부는 방사능 농도가 옅은 저준위 방폐물을 1단계 동굴처분시설에 보관해왔다. 원자력발전소 작업자가 착용한 작업복과 장갑 등이 저준위 방폐물에 해당한다. 앞으로는 방사능 농도가 좀 더 짙은 중준위 방폐물만 이곳에서 처분될 예정이다. 저준위 방폐물은 인근에 공사 중인 2단계 표층처분시설로 간다. 표층처분시설은 동굴이 아닌 지표에 설치한 처분고에 방폐물을 채운 후 밀봉하는 공간이다. 2024년 완공 예정인 표층처분시설은 드럼통 12만5000개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산업통상자원부는 2016년 경주에서 발생한 지진을 계기로 이 2단계 표층처분시설의 내진 성능을 규모 7.0 지진에도 견딜 수 있는 5중 다중차단구조로 강화했다. 이날 기자단과 함께 경주 방폐장을 찾은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1단계 동굴처분시설의 건설·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2단계 표층처분시설도 국민 안전을 최우선에 놓고 건설하겠다”고 했다.

사일로 안에 쌓인 콘크리트 처분용기들. 각 처분용기에는 중·저준위 방폐물이 담긴 드럼통 16개 들어간다. / 전준범 기자

◇ 사용후핵연료는 임시저장소에…“고준위 방폐장 서둘러야”

문제는 방사능 농도가 가장 짙은 고준위 방폐물, 즉 사용후핵연료다. 사용후핵연료는 원자로 내에서 쓰이다가 수명을 다한 우라늄 핵연료다. 섭씨 300도에 달하는 높은 열과 방사능을 내뿜어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 사용후핵연료 보관소는 임시저장시설, 중간저장시설, 영구처분시설 등 세 가지로 나뉜다. 현재 국내에는 임시저장시설만 존재한다. 바로 이게 문제다. 임시저장시설은 말 그대로 잠시 머무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이날 취재진은 1단계 동굴처분시설에 이어 경주 월성 원전 내 사용후핵연료 임시저장시설인 ‘맥스터’도 방문했다. 사용후핵연료는 원전 내에서 열과 방사능이 자연스레 줄어들 때까지 5년 이상 보관하는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쳐야 한다. 이를 임시저장이라고 부른다. 임시저장 방법은 핵연료를 물에 넣어 보관하는 ‘습식’과 공기로 열을 식히는 ‘건식’으로 구분된다. 이 중 맥스터는 건식 임시저장시설에 속한다.

경주 월성 원전에 있는 건식 임시저장시설 '맥스터'. 직육면체형 콘크리트 건물 하나당 사용후핵연료가 담긴 강철 원통을 40개씩 보관할 수 있다. / 한국수력원자력

월성 원전에는 총 14기의 맥스터가 있다. 직육면체형 콘크리트 건물 하나당 사용후핵연료가 담긴 강철 원통을 40개씩 보관한다. 현장 안내를 맡은 한국수력원자력 월성원자력본부 관계자는 “강철 원통 하나에는 폐연료봉 60다발이 들어간 바스켓 10개가 수직으로 쌓여있다”며 “각 맥스터에 폐연료봉 2만4000다발씩 보관되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임시저장시설과 중간저장시설을 거치며 열과 방사능을 낮춘 사용후핵연료는 언젠가 영구처분시설로 가야 한다. 통상 영구처분시설은 지하 300~1000m 깊이 암반에 저장하는 심층처분 방식을 택한다. 정부는 1980년대부터 고준위 방폐장 부지를 물색했으나 지역 주민과 시민단체 등의 반대에 막혀 성과를 내지 못했다. 반면 핀란드는 2025년, 스웨덴은 2035년부터 고준위 방폐물 처분시설 운영에 돌입한다.

이창양 장관은 “고준위 방폐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원자력 발전의 혜택을 누린 현(現)세대의 의무이자 책임”이라며 “처분시설 확보를 더는 미루면 안 된다”고 했다. 이 장관은 “고준위 방폐물 관리 특별법을 제정하고, 연구개발(R&D) 로드맵을 통해 관련 기술을 확보하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