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소재 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최민정(가명·35세)씨는 최근 물가 관련 뉴스를 볼 때마다 한숨만 나온다. 서울 집값부터 기름값, 매일 마시는 커피 가격 등 밥상물가까지 다 올랐는데 월급은 그대로라 주머니 사정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최씨는 “‘월급 빼고 다 올랐다’는 말이 요즘처럼 와닿은 적이 없다”고 푸념했다.

우리나라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지난달 10년 만에 4%대로 치솟으면서 한국 경제에 비상이 걸렸다. 물가 상승으로 최씨처럼 자금 사정이 나빠진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으면 소비가 위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비용 인상에 대응해 허리띠를 졸라맨 기업이 고용과 생산, 투자를 줄이면 경제가 활력을 잃고 침체에 빠질 수 있다.

고(高)물가 기조 속에서 최씨와 같은 근로자들이 월급 인상을 요구하면서 조만간 국내 노동시장의 임금 상승 압력도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근로자 입장에서 임금 인상은 반가운 소식이지만, 지금처럼 대내외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 임금이 오르면 한국 경제가 ‘물가 상승→임금 인상→기업 비용 증가→제품 가격 인상→추가 물가 상승’이란 악순환의 고리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9일 오전 서울 시청역에서 마스크 쓴 시민들이 출근길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 美 ‘인력난→임금 인상→추가 물가상승’ 고물가 고착화 우려

시장에서는 그간 글로벌 물가 상승을 주도해온 각종 악재들이 좀처럼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로 인한 공급망 차질 심화, 국제유가 등 원자재 가격 급등이 인플레이션을 부채질하는 양상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전쟁 장기화, 소비 회복, 인력 부족에 따른 임금 인상으로 당분간 높은 수준의 인플레이션이 유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 미국에서는 근로자 임금이 뛰면서 소비자물가가 연쇄적으로 상승하는 ‘도미노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기간 직장을 그만두거나 더 나은 대우를 받기 위해 이직을 하는 근로자들이 늘면서 인력난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수요 회복과 함께 최악의 인력 부족에 직면한 서비스업이 경쟁적으로 임금을 인상했고, 임금 인상분이 제품 가격 등에 반영되면서 물가에 전이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미 최대 전자상거래기업 아마존에서는 고위 임원들이 11% 임금 인상폭에도 만족하지 못해 줄퇴사하는 일이 발생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과 노동력 부족 사태를 감안하면 11% 인상은 부족하다고 본 직원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지난달 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8.5%로 4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이달 21일 발간한 ‘베이지북’에서 “미국의 노동 수요는 여전히 강하지만 인력 부족이 가장 큰 걸림돌”이라면서 미국의 경제 성장 전망을 어둡게 하는 주된 요인 중 하나로 구인난에 따른 임금 상승을 꼽았다.

◇ 물가 상승, 올해 하반기부터 임금에 반영

경제 전문가들은 우리나라도 임금발(發) 물가 상승을 겪을 가능성이 커졌다고 평가했다. 한국은행 고용분석팀은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최근 물가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노동시장이 회복세를 보이면서 물가상승이 임금 인상으로 이어지는 이차효과(secondary effect) 가능성이 제기된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올해 하반기부터 임금상승률이 높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물가 충격은 4분기의 시차를 두고 임금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이 1%포인트(p) 높아질 때 임금은 4분기 이후부터 상승한다는 의미다. 오삼일 한국은행 조사국 고용분석팀 차장은 “지난해 3~4분기부터 크게 오른 물가가 올해 하반기부터 임금상승률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해 10월을 기점으로 3%를 돌파했고, 올해 3월부터 4%대로 올라섰다. 시장에서는 4월 물가상승률도 4%를 훌쩍 넘길 것이라고 보고 있다. 물가 충격이 4분기 이후 임금에 반영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임금 상승 압력도 내년 상반기까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픽=손민균

다만 우리나라는 노동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해 임금이 오르는 미국과 달리 ‘기대인플레이션’이 물가를 자극하는 측면이 더 강하다. 가계와 기업이 예상하는 미래 물가상승률인 기대인플레이션율은 지난달 3%를 돌파하면서 9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기대인플레이션은 자기 예언적인 특성이 있어서 중앙은행과 정책당국이 예의주시하는 물가지표다. 근로자가 물가 상승을 예상하면 고용주에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기업은 임금 상승분은 물론 원재료 인상분까지 제품 가격에 반영하면서 소비자 물가가 더 오르는 원리다. 물가가 계속 오를 것이란 전망이 인플레이션을 부채질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기대인플레이션을 적정 수준에서 통제하지 못하면 물가 상승에 따른 임금 인상이 물가를 추가로 밀어올리는 ‘임금·물가의 악순환적 상승(wage-price spiral)’이 고착화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임금이 1% 오르면 소비자물가지수는 6분기 이후 0.3% 상승하는 것으로 조사됐다”며 “지금처럼 물가상승률이 높은 시기일수록 노동비용이 쉽게 물가에 전가되는 경향이 뚜렷하기 때문에 물가 안정에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생산성이 높은 기업이나 산업에서의 임금 인상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단지 물가가 올랐다는 이유로 노동시장 전반의 임금이 큰 폭 조정되면 ‘임금·물가의 악순환적 상승’이 나타나면서 인플레이션을 부추기고, 경기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