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유럽연합(EU)과 일본에 이어 영국과도 ‘트럼프표’ 철강 관세를 철폐하기로 했다. 반면 수출 물량 할당제(쿼터)에 묶여 대미(對美) 철강 수출에 애를 먹고 있는 한국은 이 문제에 관해 미국과 논의조차 못 하고 있다. 미·영 합의 소식에 다급해진 정부는 국내 철강 업계와 긴급 간담회를 열었다. 그러나 “미국에 재협상을 계속 요구하겠다”는 기존 입장에서 딱히 진전은 없었다.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왼쪽)과 캐서린 타이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가 3월 16일(현지시각) 미국 미시간주에 있는 SK실트론CSS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이 자리에서 타이 대표는 한국과 철강 관세 관련 재협상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 연합뉴스

산업통상자원부는 23일 오후 국내 철강 업계와 민·관 합동 화상 간담회를 열어 미·영 철강 관세 합의에 따른 우리나라 수출 영향과 향후 대응 방안 등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간담회에는 한국철강협회와 포스코(POSCO), 현대제철(004020), 동국제강(460860), 세아제강(306200) 등 주요 대미 수출 철강사가 참석했다.

앞서 로이터통신은 22일(현지시각) 미국과 영국이 영국산 철강 제품의 대미 수출 물량 중 연간 50만톤(t)에 대해 무관세 혜택을 적용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영국은 미국 제품에 대한 보복관세를 완화하기로 했다.

산업부는 회의에 참석한 업계 관계자들이 “영국의 대미 철강 수출량이 많지 않아 이번 합의가 한국 철강 업계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평가했다고 전했다. 또 업계가 그간 미국과 재협상하기 위해 노력해온 정부 협상팀을 지지했으며, 계속해서 함께 대응해 나가자는 뜻을 밝혔다고도 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한국 철강 기업들이 미국 시장에서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미국과 지속해서 협의해 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그래픽=손민균

정부와 철강 업계가 의기투합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미국이 한국의 철강 관세 관련 재협상 요구에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어서다. 캐서린 타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지난 16일(현지시각) 한국과 철강 관세 재협상에 나설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한국은 철강 수입 관세 조치의 혜택을 가장 먼저 확보한 국가 중 하나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고 답했다.

타이 대표는 한국산 철강 제품의 대미 수출량이 제한적인 것과 관련해서도 “쿼터제를 통해 이미 한국산 철강 제품 일부에 대해 면세 수입을 허용하고 있고, 이는 대부분의 우리 무역 파트너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또 그는 “한국은 다른 많은 국가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고, 이미 혜택을 받고 있음을 모든 사람이 상기하길 원한다”고도 했다.

미국이 수입 철강 제품에 고율 관세를 부과한 건 전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절이던 2018년의 일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국 산업 보호와 국가 안보 등을 이유로 미국에 들어오는 외국산 철강 제품에 25%, 알루미늄 제품에 10%의 관세를 각각 부과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작년 10월 EU산 철강에 대한 관세를 철폐한 데 이어 지난달에는 일본과도 철강 관세 분쟁을 끝냈다. 그리고 이번에 영국과도 합의한 것이다.

반면 한국은 미국 정부와 협상 당시 25% 관세를 면제받는 대신 철강 수출을 직전 3년 평균 물량의 70%로 제한하는 쿼터를 받아들였다. 그때는 미국과 갈등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으나, 바이든 행정부가 정책 노선을 갈아타면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관세 철폐로 미국 시장에서 EU·일본·영국산 철강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개선되면 그만큼 한국산 제품은 설 자리를 잃을 수 있어서다. 국내 철강사들은 지난해 글로벌 철강 시황 호조에도 쿼터에 막혀 미국에 추가 물량을 수출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