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미국과 우리나라의 금리인상 일정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미국은 연초부터 공격적인 긴축(돈 거두기)을 예고했지만, 전쟁 충격으로 경기 둔화 우려가 커지면서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인상 속도가 예상보다 느려질 것이란 전망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사회의 러시아 경제 제재가 글로벌 교역을 위축시키고, 국제유가를 포함한 원자재 가격을 더 밀어올리면 세계 경제가 1970년대식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에 빠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경제 전문가들은 진단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틀째인 25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수도 키예프 시내에서 러시아군의 진군에 대비해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다.

◇ “Fed 3월 기준금리 0.5%p 인상 가능성 낮아져”

지난달 중순까지만 해도 시장에서는 연준이 이달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한 번에 0.5%포인트(p) 인상하는 ‘빅 스텝’을 단행할 것이란 예상이 많았다. 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올해 1월 7.5%로 40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하면서 연준이 금리인상으로 인플레이션(지속적인 물가 상승)을 억제할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사태로 국제 정세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연준의 빅스텝 가능성이 낮아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부 연준 인사들도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지정학적 위험이 미국 경제에 미칠 파급효과를 고려하면서 통화정책을 운용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로레타 메스터 클리블랜드 연은 총재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중기적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을 높이고 성장을 저해하면서 미국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이를 고려해 금리인상 속도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 최대 채권 운용사 핌코의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모하메드 엘-에리언 알리안츠 수석 경제 고문은 CNBC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한 번에 금리를 0.5%p 올리는 것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투자은행 JP모건 등이 예측한 올해 8~9회 금리인상도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

◇ 다시 고개 든 스태그플레이션 악몽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간 전쟁으로 공급차질이 심화되고 국제유가 등 에너지 가격이 뛰면서 세계 경제가 ‘인플레이션→소비 위축→경기 둔화’ 수순을 밟을 가능성도 커졌다. 이미 국제유가는 배럴당 100달러에 근접한 수준까지 치솟았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간 전쟁이 전면전으로 치닫는 경우 물가 상승 압력이 더 커질 수 있다”며 “양국이 글로벌 원자재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기 때문에 곧바로 원자재 수급 불균형이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브루스 카스만 JP모건 이코노미스트는 “국제유가가 배럴당 120달러~150달러 수준까지 오를 경우 세계 경제 성장률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특히 이번 전쟁은 세계 경제가 코로나발(發) 경제 위기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발발한 만큼, 국제 사회의 러시아 제재로 인한 세계 교역 위축은 경제 성장을 저해할 공산이 크다.

일각에서는 1970년대식 스태그플레이션이 재발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글로벌 원자재와 곡물 가격을 밀어올리면서 물가를 자극하고 성장률을 끌어내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이는 1970년대 욤 키푸르 전쟁으로 인한 요일쇼크가 인플레이션을 유발한 상황과 비슷하다”고 전했다.

앞서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중동전쟁이 촉발한 제1차 요일쇼크(1973~1974년)로 인해 주요국은 두 자릿수 물가 상승률과 마이너스 성장이 겹친 스태그플레이션을 겪었다. 당시 미국의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0%, 우리나라의 물가상승률은 25%를 넘겼다. 미국은 1979년 폴 볼커 당시 연준 의장이 기준금리를 연 15.5% 수준까지 4%p 대폭 인상한 뒤에야 스태그플레이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허재환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진짜 악재는 인플레이션과의 신(新)냉전 상황”이라며 “자원의 무기화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더 높아질 수 있어 경기둔화에도 금리를 올려야 하는 70년대식 스태그플레이션 망령이 되살아날 수 있다”고 했다.

물가 고공행진 속 마트서 장 보는 미국인

◇ 정부 재정지출 확대 기조 지속 우려도

시장에서는 제롬 파월 의장이 이끄는 연준이 이번에 어떤 결정을 내릴지 주목하고 있다. 연준 입장에서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인상에 속도를 내자니 경기 침체가 우려되고, 긴축을 늦추자니 물가 폭등이 걱정되는 상황이다.

이번 전쟁을 기점으로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 정부의 재정지출이 오히려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전망도 중앙은행의 긴축 행보에 영향을 미칠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FT는 “주요국이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기 에너지 전환 정책에 속도를 내고, 국방 예산을 확대할 것”이라고 했다.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체계에서 벗어나려면 정부는 신재생 에너지와 수소, 원자력 발전 가동에 필요한 인프라 구축에 막대한 금액을 투입해야 한다.

냉전 종식 이후 원칙적으로 군사비 감축 기조를 유지해왔던 독일은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국방을 강화하겠다고 선언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지난 27일(현지시각) 의회 연설에서 “러시아 제국 건설이라는 야망을 품은 푸틴을 경계하고 그 위협에 맞서려면 국방비 증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무기 마련 등 군비 증강에 1000억유로(약 134조8900억원)를 투자하고, 매년 국내총생산(GDP)의 2% 이상을 국방비로 지출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