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우크라이나 침공의 책임을 물어 러시아에 대한 수출 통제를 발표했다. 러시아로 가는 수출품 중 미국산 기술이 들어간 제품이 통제 대상인데, 대부분의 미국 동맹국은 규제 리스트에서 빠졌다. 그런데 한국은 중국과 함께 통제 명단에 올랐다. 미국의 러시아 제재 동참 요구에 한국 정부가 뜨뜻미지근하게 반응한 결과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받을 불이익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비판이 커지자 문재인 대통령은 뒤늦게 러시아에 대한 국제 제재에 동참한다고 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월 24일(현지시각) 미 워싱턴DC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에 대해 대국민 연설을 하고 있다. 이날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 제재 방안을 공개했다. / AP 연합뉴스

◇ 美 동맹국 빠진 대러 수출 통제 대상에 韓·中 포함

28일 산업통상자원부 등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러시아를 상대로 수출 통제에 나선 미국과 3월 초 협의를 시도한다. 산업부 관계자는 “미국 발표 내용을 토대로 한국 산업계에 미칠 영향을 면밀히 분석하고, 미국 조치에 따른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미국과 협의를 신속히 추진할 계획”이라고 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달 24일(현지시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면서 수출 통제와 대형은행 차단 등이 포함된 러시아 제재안을 발표했다. 대러 수출 통제에는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이 포함됐다. FDPR에 따르면 반도체·정보통신·센서·레이저·해양·항공우주 등 57개 품목·기술 분야에서 미국산 기술·소프트웨어(SW)를 사용한 국가는 앞으로 미국 상무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러시아에 수출할 수 있다.

다만 미국은 자신들과 함께 대러 제재를 발표한 유럽연합(EU) 27국과 일본·호주·영국·캐나다·뉴질랜드는 FDPR 규제 조치에서 뺐다. 이들 국가가 자체적으로 대러 수출 통제 계획을 밝힌 만큼 미국산 기술이 담긴 제품이라도 자국 정부가 허가했다면 미 상무부의 허가 없이도 수출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하지만 FDPR 면제 대상에 한국은 포함되지 않았다. 미국의 주요 동맹국 가운데 이 명단에서 제외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중국과 인도도 FDPR 면제권을 얻지 못했다. 이들 국가 기업은 러시아 수출을 시도할 때마다 미 상무부에 일일이 가능 여부를 확인해야 하는 불편함이 생긴 것이다. 정부가 부랴부랴 3월 초 미국과 협의에 나서겠다고 밝힌 속사정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월 25일 청와대 여민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현안 점검회의에서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보고를 받고 있다. / 연합뉴스

◇ 연일 회의하고도…업계 “불확실성 커졌다”

그간 한국 정부는 미국의 러시아 제재 동참 요구에 동의 의사를 나타내면서도 실행에는 나서지 않았다. 정부 관계자는 “대러 수출 통제가 우리나라 기업에 미칠 파장을 다각도에서 점검했다.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산업계에서는 정부의 이런 미온적인 태도가 오히려 기업에 악재로 작용했다는 푸념이 나온다. 한 기업 관계자는 “FDPR 규제 대상에 오른 자체로 기업들 수출에 불확실성이 커졌다”고 했다.

정부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무력 충돌로 번지기 전부터 국내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며 연일 대책 회의를 열었다. 지난달 발족해 주 2회 개최하던 범부처 합동 우크라이나 비상대응 태스크포스(TF) 회의의 경우 최근 1일 1회 개최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정부는 이 TF 회의뿐 아니라 관계장관회의(녹실회의), 통상추진위원회, 실물경제 점검회의 등을 매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결과는 ‘동맹국 중 유일한 FDPR 규제 대상’으로 돌아왔다.

28일 산업부가 주최한 긴급 간담회에 참석한 전문무역상사 관계자들은 미국의 대러 수출 통제 조치에 따른 불확실성 확대를 우려하며 정부에 관련 정보를 신속히 제공해달라고 요구했다. 여한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은 “미 상무부 산업안보국(BIS)과 국장급 협의를 하고, 내가 직접 미 정부 고위층을 연쇄 접촉하겠다”고 했다.

다급해진 청와대도 사태 수습에 나섰다. 이날 문재인 대통령은 “러시아에 대한 국제 제재에 동참하면서, 제재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의 대응 방안은 확실하게 마련하라”고 했다. 정부는 그제서야 “국제 사회의 제재 조치와 유사한 수준으로 러시아에 대한 수출 통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