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현재 수준인 연 1.25%로 유지하기로 했다. 이미 기준금리를 세 차례에 걸쳐 선제적으로 인상한 만큼, 당분간 금리인상의 파급효과를 점검한다는 차원에서 속도 조절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대통령 선거가 2주 앞으로 다가온 데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침공 우려로 시장 불확실성이 커진 점도 금리 동결 결정에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 꼽힌다.

이날 금리를 동결했지만, 한국은행은 최근 물가 상승세가 가팔라진 점을 들어 추가금리 인상이 필요하다고 시사했다. 한국은행은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기존 2%에서 3.1%로 대폭 올려잡았다. 한은이 3% 이상의 물가 상승률을 예상한 것은 2012년 이후 10년 만에 처음이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24일 통화정책방향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기준금리를 연 1.5%로 한 차례 올려도 긴축으로 볼 수 없다”며 “물가가 많이 올랐기 때문에 완화 정도는 더 커졌다”고 말했다. 최소 2~3 차례 추가 인상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날 금통위는 지난 8년간 한국은행을 이끌어온 이주열 총재가 다음달 퇴임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주재한 회의였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24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를 주재하며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 기준금리 연 1.25% 만장일치 동결

이날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만장일치로 기준금리를 연 1.25%로 동결했다. 금통위는 코로나 확산 이후 연 0.5%로 낮춘 기준금리를 지난해 8월(0.5→0.75%), 11월(0.75%→1%), 올해 1월(1%→1.25%)까지 총 세 차례 올린 뒤 이번에 동결을 선택했다. 시장 예상과 달리 금리인상을 주장하는 소수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지정학적 위험 확대, 국내 코로나 확진자 폭증, 대선이 2주 앞으로 다가온 점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인상 결정이 임박한 가운데 다음달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 결과를 보고 4월 금통위에서 후속 조치를 취해도 늦지 않다는 판단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금통위는 “그간 세 차례에 걸쳐 선제적으로 금리를 조정했다”며 “지금 시점에서는 주요국의 통화정책 방향, 지정학적 리스크 등 대외 여건 변화가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는 점을 고려해 기준금리를 현 수준(연 1.25%)에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대내외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금리를 연속으로 세 차례 인상하면 시장이 크게 흔들릴 수 있고, 그간 대출을 받아 부동산·주식에 투자하거나 생계를 유지해온 가계의 빚 부담이 갑자기 늘어나는 등 각종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한은이 이번에 ‘숨 고르기’를 택했다는 분석이다.

그래픽=이은현

◇ “올해 물가상승률 3.1%…추가인상 필요”

이번에는 금리를 동결했지만,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 행보는 연말까지 지속될 전망이다. 최근 3%대로 치솟은 물가 상승세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추가 금리인상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이주열 총재는 “앞으로 높은 물가 상승률이 상당 기간 이어지고, 금융불균형을 줄여나갈 필요성이 여전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통화정책의 완화 정도를 계속 적절히 조정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연말 기준금리 수준이 연 1.75~2.0%에 달할 것이란 시장 기대에 대해서는 “시장 예상과 금통위의 시각에 큰 차이가 없다”고 했다. 사실상 연내 2~3회 추가 금리인상이 필요하다는 의사를 내비친 것이다.

이날 한국은행은 ‘수정 경제전망’을 내고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3.1%로 제시했다. 지난해 11월 발표한 기존 전망치(2%)와 비교해 1.1%포인트(p) 높은 수준이다. 연초부터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향해 뛰고, 공급차질이 예상보다 오래 지속되는 흐름을 감안해 물가 전망을 대폭 상향 조정했다고 한은은 설명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간 전쟁이 전면전으로 치닫는 최악의 경우에는 물가 상승 압력이 더 커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 총재는 “양국이 글로벌 원자재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기 때문에 곧바로 원자재 수급 불균형이 나타날 것이고, 이는 물가 상승 압력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다만 이 총재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 총재는 물가 상승 우려에도 한국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 위기에 직면한 단계는 아니라고 평가했다. 그는 “수출 호조와 소비의 기조적인 회복에 힘입어 올해는 물론 내년까지 잠재 수준을 웃도는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한다”며 “스태그플레이션을 우려할 상황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이날 한은은 코로나 확산에도 국내 경제가 견조한 수출과 소비를 중심으로 회복세를 이어갈 것이라면서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을 기존 3%로 유지했다.

이날 마지막 금통위를 주재한 이 총재는 4월 이후 한은 총재 공백 가능성을 우려하는 질문에는 “후임 총재 임명은 전적으로 인사권자인 대통령이 결정하기 때문에 제가 언급할 사안은 아니다”라면서도 “지금의 국내외 경제·금융 상황을 고려하면 총재 공백기가 없는 게, 있어도 아주 최소화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했다. 이 총재가 임기를 마치고 4월 1일부터 공백 없이 신임 총재가 취임하려면 3월 초에 총재 후보가 발표되고 청문회를 거쳐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