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원전은 세계적 추세라는 말이 설득력을 잃은 상태에서 다른 나라를 방문한 우리 대통령이 한국 원전의 우수성을 강조했어요. 그 모습이 참 묘하게 다가왔습니다.”

25일 에너지 업계의 한 원로급 인사는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기조가 차기 정부에서도 이어질 것 같냐는 질문에 대뜸 문 대통령의 최근 중동 3개국 순방을 언급했다. 이 관계자는 “문 대통령의 목적은 원전 세일즈였겠지만, 국내에서 탈원전 추진 동력이 약해졌고 원전을 바라보는 대선 후보들 시각도 현 정권과 다르지 않느냐”며 “탈원전을 외쳐온 문 대통령이 아이러니하게도 차기 정부의 에너지 정책에 기대감을 갖게 했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1월 18일(현지시각)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야마마궁에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공식회담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에너지 업계에 ‘묘하게 다가갔다’는 장면은 문 대통령이 지난 18일(현지시각)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회담에서 “한국 원전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성과 안전성을 가졌다”고 말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한국이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사업을 상업 운전까지 성공적으로 수행한 바 있다”고 강조하며 대형 원전 건설을 계획 중인 사우디에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보냈다.

문 대통령이 해외에서 한국 원전을 추켜세우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8년 체코 총리와 만났을 때는 “한국 원전은 지난 40년 동안 단 한 건의 사고도 일으키지 않았다”고 자랑했다. 이 당시에도 국내에서는 문 대통령의 모순적 언행을 지적하는 여론이 있었지만, 이번 사우디 발언에 대한 반응은 3년 전보다 훨씬 더 살벌해졌다. “한국 원전이 사고도 내지 않고 경제성도 뛰어난 사실을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왜 5년째 탈원전을 고집하느냐”는 반응이 쏟아졌다.

전문가들은 탈원전 정책에 대한 부정론이 급증한 이유 중 하나로 유럽연합(EU)의 원전 회귀 움직임을 꼽는다. 문 정부는 2017년 출범 당시 EU를 모델 삼아 에너지 정책을 짰다. 지난 5년간 ‘2050 탄소중립’ ‘한국형 녹색 분류체계(K택소노미)’ 등 국가 핵심 정책 수립에서 원전을 노골적으로 배제하며 EU의 탈원전 정책을 따랐다. 그런데 EU가 최근 원자력을 녹색 분류체계(Green taxonomy)에 포함하는 내용의 에너지 정책 전환을 선언했다. 한국으로선 닭 쫓다가 지붕 쳐다보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글로벌 기조가 바뀌자 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추종해온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수력원자력의 목소리도 달라지고 있다. 이들 에너지 정책 담당 부처·기관마저 탈원전에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이다.

일례로 국내 24개 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하는 한수원은 이달 초 김도읍 국민의힘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서 “원전 운영에 있어 최우선 가치는 언제나 안전”이라고 했다. 이는 “원전은 값싼 발전 단가를 최고로 여겼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후순위였다”는 문 정권의 탈원전 추진 배경을 부정한 셈이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지난해 12월 29일 경북 울진군 신한울 3·4호기 건설 중단 현장을 방문해 원자력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산업부의 경우 지난해 말 한수원이 탈원전 정책에 따른 사업 중단에 대해 비용 보전을 신청하면 정부가 이를 보상해주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 바 있다. 당시 업계에선 사업 중단에 대한 최종 결정이 나지 않은 신한울 3·4호기까지 보전 대상에 포함될 경우 보상액이 1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많은 국민이 “혈세까지 동원해 탈원전을 추진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산업부는 절차적 장치를 마련한 것일 뿐, 실제로 신한울 3·4호기 사업 중단을 염두에 둔 조치가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산업부 관계자는 “대선이 코앞이고 후보들도 (원전과 관련해) 다른 목소리를 내는데, 이런 시기에 과연 한수원 보상을 강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실제로 대선주자들은 에너지 정책과 관련해 문 정부와 다른 약속을 내걸고 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문 정부의 무분별한 탈원전 정책으로 무너져 가는 경남의 원전 산업을 되살리고, 세계 최고의 한국형 원전 산업으로 진화를 모색하겠다”고 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는 “바람이 불지 않거나 밤이 되면 생산하지 못하는 신재생에너지는 한계가 많다”며 원전 가동을 약속했다. 심지어 여당 대선 후보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도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에 대해 “국민 의견에 맞춰 재고해 볼 수 있다”고 했다.

원전 업계 한 관계자는 “요즘 관련 부처 공무원을 만나봐도 (에너지 정책) 노선 변경에 대비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산업부 관계자는 “대선 후 에너지 정책 기조를 공무원이 알 수는 없다”면서도 “각 당 후보들이 내놓는 여러 방향성을 주시하는 건 사실”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