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유가가 배럴당 80달러가 넘는 등 기름 값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가운데, 여당을 중심으로 유류세 인하를 요구하면서 정부의 결정이 주목되고 있다. 특히 갑작스런 추위에 따른 수요 증가와 원·달러 환율까지 상승해 ‘체감 유가’는 이미 100달러에 육박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연간 2%대의 물가 상승률과 영세 소상공인과 서민들의 물가 부담을 고려하면 유류세 인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입장은 부처마다 엇갈리고 있다. 에너지를 담당하는 산업통상자원부는 유류세 인하를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물가관리 주무부처인 기획재정부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기재부가 유류세 인하에 신중한 것은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2018년보다 40% 감축하는 온실가스 감축계획(NDC)을 발표한 정부가 탄소 배출을 늘리는 화석연료 소비를 부추기는 정책을 추진하는 모양새가 연출되기 때문이다. 경제부처 안팎에서는 20~21일 기획재정부 국정검사에서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유류세 인하 관련 입장을 제시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지난 17일 오후 제주시의 한 주유소 입구에 휘발유 ℓ당 1780원, 경유 ℓ당 1590원을 알리는 가격안내판이 서 있다. /연합뉴스

◇기재부, 유류세 인하 효과 검토중

20일 뉴욕상업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18일(현지시각) 11월물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은 전 거래일 대비 0.16달러(0.19%) 오른 82.44달러에 거래를 마감했다. 이는 2014년 10월 21일 이후 최고치다. 장중 83.87달러까지 치솟았다. WTI가격은 이달 들어서만 10%, 올해에는 70%가량 올랐다.

기재부는 공식적으로 “구체적인 유류세 인하 방안에 대해 검토한 바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여러 방안을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유가는 공공요금을 비롯한 국내 산업 전반의 비용 상승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수입 가격이 오르면 소비와 투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경제 회복에도 상당한 부담이 될 수 있다.

이에 2018년 국제유가 70달러선이 뚫렸을 당시 유류세 인하 처방을 내린 정부가 3년 만에 다시 같은 카드를 꺼내 들지 주목되고 있다. 앞서 기재부는 2018년 11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총 10개월간 두 차례에 걸쳐 15%, 7%씩 유류세 인하를 단행한 바 있다. 유류세는 탄력세 체계여서 30% 이내에서는 국회를 거치지 않고 정부 시행령 개정만으로 세율을 내릴 수 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연합뉴스

현재 기재부는 유류세 인하 효과에 대한 검토 작업에 돌입했다. 정부 관계자는 “2018년 유류세 인하를 하자마자 국제유가가 내려가는 바람에 인하를 왜 했는지 효용성 논란이 있었고, 국제유가 상승기에 유류세를 인하하면 세금 인하 효과를 체감할 수 없다는 문제점이 있다”면서 “유류세 인하는 타이밍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여러가지 관점에서 내부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이어 “다만, 최근 탄소중립이라는 정책 방향이 나온 상황에서 기름 소비를 촉진시키는 유류세 인하는 정책 엇박자라는 인식을 줄 수 있어, 사회적 분위기와 유가를 면밀히 모니터링 하고 있다”고 했다.

이미 국회 등에서는 고유가가 서민경제 어려움을 가중하고 경제 회복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높은 만큼, 유류세 인하를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홍정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5일 산자위 국감에서 “코로나 위기에 고유가까지 겹쳐 소상공인과 서민을 위한 적극적인 구제정책이 필요하다”며 “과거의 사례와 비교해도 유류세를 내려야 할 필요성이 충분해 유류세 15% 인하가 추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년 3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다는 점도 유류세 인하가 이뤄질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유류세 인하는 정부 여당이 서민들의 경제활동을 지원한다는 체감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카드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야당이 반대할 이유도 없다. 세수 여건도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지난 8월말 현재 국세수입은 정부 전망치에 비해 55조원 이상 더 걷혀, 정부가 2차 추가경정예산에서 예상한 31조5000억원보다 20조원 이상 초과한 상태다. 따라서 유류세 인하로 세수가 줄어들어도 재정 운영에는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홍남기 부총리는 기재부 국감에서 이같은 다양한 요인 등을 감안한 유류세 인하 관련 방침을 제시할 것으로 전망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8일 서울 용산구 노들섬다목적홀에서 열린 2050 탄소중립위원회 제2차 전체회의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탄소중립에 발목잡힌 유류세 인하... 홍 부총리, 입장 발표할 듯

그러나 유류세 인하는 정부가 지난 18일 확정한 2050 탄소중립 계획과 상충될 수 있다. 탄소중립위원회는 지난 18일 2050년까지 석탄발전을 전면 중단하고,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2018년보다 40% 감축하는 온실가스 감축계획(NDC)을 발표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 2017년 한국의 대기오염과 온실가스 배출이 심각하다는 이유로 환경세 인상을 권고하기도 했다.

정부가 유류세 인하에 신중한 것도 이러한 배경 탓이다. 탄소저감을 위해서는 유류 사용 감축이 필수적인 요소인데, 정부가 유류세 인하로 유류 소비를 부추긴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내년 대선을 앞두고 유류세 인하가 자칫 선거용 ‘돈뿌리기’로 비춰질 가능성도 있다.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의 모습 /연합뉴스

문제는 국제 유가가 당분간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시장에서는 WTI를 비롯한 유가가 100달러를 돌파할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한다. 세계적인 에너지 대란과 한파로 인한 수요 증가가 원인이다. 미국 은행인 JP모건체이스는 올해 말 브렌트유 가격을 배럴당 84달러로 예측했다. 씨티그룹은 85~90달러, 뱅크오브아메리카는 100달러를 전망했다. 여기에 겨울철 난방 수요 증가와 수출 증가세 둔화에 따른 외국인 자금 유출 등 원화 약세도 악재다.

최원석 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고유가 상황이 장기화 될 경우, 원유를 100% 수입에 의존하는 한국의 경제 구조상 국민들의 어려움이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며 “다만, 위드 코로나로 소비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유류세 인하 혜택을 전국민이 아닌, 실질적으로 어려운 계층을 타깃으로 제공할 필요가 있다. 혹은 유종에 따라 선별적으로 정책적 혜택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