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으로 물가 상승 압력이 커지는 가운데 친환경 경제로의 전환에 필요한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면서 물가를 밀어올리는 이른바 ‘그린플레이션(greenflation)’ 현상이 본격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린플레이션은 친환경을 의미하는 ‘그린(green)’과 지속적인 물가 상승을 뜻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을 합친 용어다. 탄소중립을 목표로 각국 정부가 탈(脫)탄소 정책을 추진하면서 친환경 산업에 필요한 원자재 수요는 증가하는데, 각종 환경 규제로 생산에 제약이 생기면서 가격이 오르는 현상이다.

LG하우시스 알루미늄 생산 라인

일례로 친환경차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전기차를 생산하려면 알루미늄 등의 비철금속이 필요한데, 세계 최대 알루미늄 생산국인 중국이 올해 전력 부족과 탄소 절감 등을 이유로 알루미늄 제련소의 가동을 중단하면서 이미 공급 부족으로 급등한 알루미늄 가격이 추가 상승 압력을 받고 있다. 알루미늄과 같은 비철금속은 생산·제련 과정에서 많은 탄소를 배출하기 때문에 각국의 환경 규제를 받고 있다. 제조공장의 탄소 배출량 감축을 유도하는 친환경 정책이 탄소중립 이행에 필요한 원자재 가격을 끌어올리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김희진 국제금융센터 책임연구원은 “알루미늄 가격은 글로벌 공급 부족 심화, 탄소배출 절감을 위한 중국의 생산 규제, 중국 전력난 등으로 13년래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설명했다.

◇ 친환경 경제 전환에 원자재 수요 급증

6일 영국 런던금속거래소(LME)에 따르면, 알루미늄 가격은 이달 1일 기준 톤당 2864달러(약 340만원)로 연초 톤당 1978달러와 비교해 약 44.8% 올랐다. 구리는 같은 기간 20% 이상, 니켈도 약 15% 상승했다. 이들 금속은 전기차 배터리를 포함한 친환경 산업에 주로 쓰이는 원료로, 경기 회복과 함께 수요는 급증하는 가운데 각국의 환경 규제로 생산은 어려워지면서 가격 상승 압력을 받고 있다.

시장 전문가들은 내년까지 원자재 수급난이 지속되면서 알루미늄, 구리, 니켈 등 비철금속의 가격도 상승세를 이어갈 것이라고 봤다.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내년 9월 알루미늄 가격이 지금보다 11% 이상 오른 톤당 3200달러를 기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구리와 니켈 가격도 톤당 1만1500달러, 2만4000달러로 약 10%씩 상승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글로벌 투자은행의 금속가격 전망 / 국제금융센터

주요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기업의 생산 비용이 늘면 소비자물가도 시차를 두고 오를 수 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은행은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세계의 공장’인 중국의 생산단가가 높아지고 수출 물가가 상승하면 글로벌 인플레이션 압력도 커질 것이라고 평가했다.

◇ 유가·천연가스 수급난에 물가 연쇄 상승 우려

올 들어 국제유가와 천연가스도 상승세다. 지난 4일(현지시각)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비(非)OPEC 주요 산유국들의 협의체인 ‘OPEC 플러스(OPEC+)’가 다음달까지 증산 속도를 하루 40만 배럴 수준으로 유지하기로 하면서 국제유가는 7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경제활동이 재개되는 가운데 원유 공급 부족에 대한 우려가 커진 영향이다. 미국 뉴욕상업거래소에서 11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은 전거래일보다 2.3%(1.74달러) 오른 배럴당 77.62달러까지 치솟았고, 브렌트유도 82달러 목전까지 급등했다.

특히 석탄발전의 대안으로 꼽히는 천연가스는 올 들어 재고는 부족한 상황에서 수요가 급증하면서 유럽에서만 가격이 250% 뛰었고, 이같은 천연가스 대란이 원유 수요를 키우면서 유가 상승을 부채질하는 양상이다.

서울 마포구 주택가에 설치된 전기 계량기.

문제는 국제유가와 천연가스 상승은 전기요금 인상으로 이어지면서 소비자물가를 밀어올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 유럽에서는 전체 전력생산의 16%를 담당하는 풍력발전이 예상 밖의 바람 부족으로 발전량이 급감하면서 천연가스·석탄발전이 늘었는데, 유럽 천연가스 가격이 치솟으면서 전기요금도 올랐다. 올해부터 전기요금을 연료비에 연동해 조정하는 한국전력도 지난달 8년 만에 전기료 인상을 결정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각국이 태양광·풍력·수소 등 신재생 에너지 중심의 저탄소 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기존 에너지원의 수요가 대폭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친환경 에너지를 개발하고 대중화시키는 동안 직간접적으로 기존의 저렴하고 효율적인 에너지원을 끌어다 사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루치르 샤르마 모건스탠리 수석글로벌전략가는 “친환경 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석유 수요도 당분간 불가피하게 늘어날 수밖에 없는데, 정부 규제로 인해 생산은 그만큼 증가하지 않아 공급 부족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골드만삭스도 석유 공급 부족 우려가 예상보다 심각하다면서 연말 브렌트유 가격 전망을 배럴당 90달러로 상향 조정했다.

국제금융센터는 “전반적으로 낮은 원자재 재고, 공급망 병목현상, 친환경 경제로의 전환에 따른 구조적인 공급부족 전망 등으로 연말까지 금속 가격이 강세를 보일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