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내년 예산을 올해 본예산보다 8% 넘게 늘린 600조원 이상을 편성하는 방향으로 돌아선 것으로 알려졌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추진하고 있는 재정준칙을 준수하는 차원에서 내년 예산 편성액을 600조원을 넘지 않으려고 했지만,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4차 유행에 따른 소상공인 손실보상 등 추가 지출이 필요하다는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의 요구에 무릎을 꿇었다. 이에 따라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 60%, 통합재정수지 적자비율 -3%를 기준으로 재정관리를 하겠다는 재정준칙은 시행하기도 전에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5월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 참석,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내년 예산 600조·국가채무 1000조 ‘벽’ 깨진다

23일 기획재정부와 국회에 따르면 당정은 코로나19 사태 대응을 위해 이같은 내용의 2022년도 예산안을 막판 조율중에 있으며 이번주 당정협의를 거쳐 확정하고, 다음달 초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정부는 현재 내년 예산 총지출 증가율을 8%대로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사실 올해 정부 예산 총지출은 이미 600조원을 넘어섰다. 올해 본예산 558조원과 2차례 추경 46조9000억원이 더해지면서, 604조9000억원이 되기 때문이다. 다만 본예산 기준으로는 아직까지 600조원을 넘어선 적이 없다. 정부가 내년 본예산 총지출을 올해보다 8% 늘리면 602조원, 8.5% 늘리면 605조원, 9%까지 높이면 608조원이 될 전망이다.

8%대 증가율은 올해 국가재정전략회의 당시 논의되던 기준선(7%대)보다 1%P(포인트) 웃도는 수준이다. 기재부는 지난주 문재인 대통령에게 내년 예산 증가율을 7.5% 내외로 보고했지만 수용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주 예산안 보고 당시 “비상한 상황인 만큼 위기 극복 예산이 필요하고, 확장 재정과 재정 건전성의 조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지시한 것으로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은 전했다.

이에 따라 내년 예산에는 백신구입을 비롯한 방역과 소상공인 손실보상 등 코로나19 확산에 대응하기 위한 예산, 탄소중립, 그린뉴딜 및 휴먼뉴딜 등 한국판뉴딜 예산이 대거 포함된다. 백신구입예산이 증액되고 올해 2차 추경에 1조원이 반영된 소상공인 손실보상 예산도 2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현 정부 출범 후 본예산 증가율은 ‘7.1%(2018년)→9.5%(2019년)→9.1%(2020년)→8.9%(2021년)’ 식으로 고공행진을 했다. 이에 따라 문재인 정부의 예산은 출범 첫해인 2017년(400조)에 비해 200조원 늘게 된다. 5년 만에 50%나 불어나는 것이다. 국가채무는 올해 말 964조원에서 내년 1000조원을 훌쩍 넘어설 것이 확실시된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2018년 35.9%에서 2020년 44.0%로 치솟은 뒤 2021년 현재는 47.2%(2차 추경 당시 추계)까지 올라 50%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같은 지출 증가 추세에 속도조절이 필요하다는 게 기재부의 시각이었지만, 내년까지 확장재정이 필요하다는 청와대와 여당의 방침에 따라 뜻을 접어야 했다.

홍남기(왼쪽에서 두번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5월 정부세종청사에서 한국형 재정준칙 도입 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멀어져가는 재정준칙... 8개월째 국회서 방치

기재부는 지난해 12월 한국형 재정 준칙 도입을 위한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8개월째 국회 기획재정위에 계류된 상태다. 그 사이 공청회 등 관련 논의는 거의 없었다. 일각에서는 2016년처럼 재정 준칙 법안이 또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폐기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문제는 확장 재정정책의 지속으로 기재부가 준용하겠다는 재정준칙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2차 추경 편성시 전망한 올해 말 기준 국가채무비율은 47.2%, 통합재정수지 적자비율은 -4.5%로 추계된다. 이를 재정준칙 산식에 대입하면 국가채무비율은 한도치(60%) 이내이지만, 적자비율이 한도치(-3%)를 넘는다.

이에 따라 산식에 따라 계산되는 평가 지표가 한도치(1.0)을 넘은 1.2로 도출돼, 결과적으로 재정준칙을 못 지킨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2025년부터 시행되는 재정준칙을 어기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내년부터는 지출액 증가 속도를 확연하게 낮춰야 하지만, 사실상 재정준칙을 지키기 어렵게 됐다.

이와 관련 신용평가사인 무디스는 지난달 22일 한국의 국가신용등급과 전망(Aa2·안정적)을 유지하면서 “정부 부채가 역사적 최고 수준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며 오랜 기간 확립돼 온 한국의 재정규율 이력이 시험대에 오를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이후 대규모 재정소요에 대응하고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해 국회가 재정준칙 논의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2019회계연도 결산분석’을 통해 “코로나19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확장적 재정정책을 사용하는 것은 재정 본연의 역할”이라면서도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한 장기적인 재정목표를 수립하고 이를 달성하려는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고 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수십 년간 국가채무비율이 40%도 되지 않았는데 불과 5년 사이에 10%P 이상 올라갈 정도로 증가 속도가 빠른 것은 문제가 있다”며 “경제 성장이나 세수 전망을 고려하지 않은 채, 현금 살포 등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보여주기식 예산이 많다. 2025년 이후 재정건전성을 장기적으로 보더라도 미리 속도 조절을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