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 반도체 생산라인에 필요한 물·전기 확보를 놓고 고민하던 SK하이닉스(000660)삼성전자(005930)가 13일 발표된 정부의 K-반도체 전략에 한 숨 놓게 됐다. 그 동안 수도권 규제 등을 이유로 지원에 난색을 표하던 관계 부처들이 최근 전세계적인 반도체 부족 현상에 놀라 입장을 바꾸면서, 10년치 용수를 확보하고 전력 공급 시설을 지원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예산과 규제를 담당하는 기획재정부 등을 수년에 걸쳐 설득해 낸 산업통상자원부의 역할이 컸다는 평가도 나온다.

13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용인 반도체클러스터에 들어설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생산시설은 2025년 1월로 예상되는 팹1 가동 시작 시점에 하루 26만5000톤의 용수가 필요하다. 향후 계획대로 생산시설이 추가될 경우, 2033년 이후부터는 하루 57만3000톤의 물이 필요하게 된다. 평택 고덕국제화계획지구의 경우도, 삼성전자 P5, P6 라인이 가동되는 2025년 12월부터 하루 25만톤의 용수가 필요한 상황이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이처럼 많은 용수가 필요한 이유는 반도체 주요 생산 공정에 물이 대량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초순수(超純水)로 불리는 다량의 깨끗한 물은 수율을 높이는데 필수적 조건으로 꼽힌다. 대만 반도체 기업인 TSMC는 최근 극심한 가뭄으로 반도체 생산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삼성전자도 미국 파운드리에서 2월 한파로 하천·수도가 얼면서 물 부족 등으로 한동안 운영이 중단돼 수천억대 손실을 본 것으로 추정된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반도체 산업이 ‘산업의 쌀’이라면, 물은 ‘반도체 산업의 쌀’”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SK하이닉스는 2019년 용인을 반도체클러스터 부지로 낙점한 뒤에도, 이 곳에서 공업용수를 확보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어 왔다. 수로가 지나갈 지자체와 주민 반대, 수도권 규제 등이 난관이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지난해 산업부를 통해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연결하는 광역 상수도망을 정부 예산으로 구축해달라는 건의를 했지만, 예산 당국인 기재부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었다. 정부 예산 사업으로 광역상수도망을 연결하면 부지 확보 과정에서 발생하는 민원 부담 등을 덜어낼 수 있다고 판단했지만, 수도권 공업시설에 정부 예산이 투입된 사례가 없다는 논리에 가로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SK하이닉스는 자체적으로 3000억원을 투입해 공업용수로를 구축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함께 반도체 생산시설에서 배출될 오·폐수 문제로 인한 어려움도 겪고 있었다. 인근 지역 주민들이 매일 배출될 수십만톤의 고온의 오·폐수를 우려해 대책 마련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번에 발표한 K-반도체 전략에서 2040수도(水道)정비기본계획에 필요한 용수물량을 선제적으로 반영하고, 여주보의 물을 전용공업용수도를 통해 용인클러스터에 공급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송수관로 구축에 필요한 하천점용허가 등 복잡한 행정절차를 최대한 신속하게 처리해 용인클러스터에 제 때 용수가 공급될 수 있게 돕기로 했다.

또 반도체 제조시설에 필수적인 공공폐수처리시설은 반도체 폐수재활용 연구개발 등을 통해 간접지원하기로 했다. 정부는 전력 기반을 확충하기 위한 지원책도 제시했다. 반도체 제조시설이 위치한 산단 등에 전력 인프라를 구축할 때 필요한 재원의 50%를 지원하기로 했다. 국비 25%, 한국전력(015760)이 25%를 나눠 부담하는 식이다. 정부는 산업부 차관이 주재하는 민관 합동 투자지원단을 통해 용수·폐수·전기 등 기반시설 구축 관련 진행상황을 점검하기로 했다.

정부가 반도체 생산라인 인프라 구축을 위해 적극적인 입장으로 돌아선 배경에는 전세계적으로 반도체 수급이 어려워진 상황이 놓여있다. 그 동안 반도체 산업 전략에 대한 고민은 산업 진흥을 담당하는 부처인 산업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반도체 공급 부족으로 현대차(005380) 등 세계 주요 완성차 업체들이 생산량 조절에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예산당국인 기획재정부와 규제당국인 환경부 등도 시각이 바뀌게 됐다.

또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를 비롯해 전세계가 경쟁적으로 반도체 산업 지원책을 내놓고 있는 점도 관계 부처에 자극을 줬다는 후문이다. 이 때문에 지난 7일 기재부가 부랴부랴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용수·전력망 구축과 관련한 지원책을 논의하는 회의를 마련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반도체 산업 진흥 정책을 뚝심있게 밀고 온 산업부 역할이 컸다. 산업부는 예산, 수도권·환경 규제, 특정 대기업에 대한 특혜 시비 등을 이유로 용인반도체클러스터의 입지 선정, 세제·용수·전력 지원 등에 난색을 표하는 타 부처를 수년간 꾸준히 설득해왔기 때문이다. 오·폐수 문제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지자체·주민과 SK하이닉스 측의 갈등 봉합에도 산업부의 숨은 노력이 컸다.

이와 관련 산업부 관계자는 “반도체 업계는 그동안 원활한 반도체 생산을 위해 용수물량 확보를 정부와 지속 논의해왔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정부의 기반시설 지원이 미온적이라는 의견이 많았다”면서 “이번 대책을 준비하면서 기재부, 환경부 등 소관 부처와 적극적으로 논의하여 10년치 용수물량 확보 및 하천 점용 허가 신속처리를 이끌어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