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진출 벤처 1세대 빈손으로 들어와”

2008년 11월 23일 조선닷컴에 게재된 기사 제목이다. 유명한 기업인 출신 벤처 창업가가 미국에서 통할 웹2.0 기업을 만들겠다며 야심 차게 캘리포니아에 진출했다가 사무실을 정리하고 돌아왔다는 내용이다. 직원 8명과 함께 부푼 꿈을 안고 새출발했던 그는 사업이 뜻대로 되지 않아 씁쓸하게 귀국해야 했다.

이 ‘벤처 1세대’는 바로 카카오를 창업한 김범수 미래이니셔티브센터장이다. 모두가 알듯 그의 인생은 불과 1년 4개월 뒤 180도로 달라졌다. 모바일 메신저 애플리케이션(앱) ‘카카오톡’을 출시해 전 국민이 사용하는 서비스로 만들었고, 지금은 한국에서 손꼽는 부호가 됐다.

사실 2008년은 전 세계 수많은 벤처 창업가를 춥고 외롭게 만들었던 해다.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경기가 얼어붙었고 당연히 돈은 돌지 않았다. 당시 언론 보도를 살펴보면, 실리콘밸리 투자자들이 지갑을 열지 않으며 이미 투자한 회사에는 성과를 내라고 재촉하고 있다는 언급이 많다. 그 해엔 국내에서도 496개 벤처 기업이 7247억원을 투자받는 데 그쳤다. 바로 전년도인 2007년 투자금(9917억원)보다 27%나 적다.

그러나 다시 돌이켜보면 2008년은 우리 기업가들이 도약을 위해 웅크리던 해이기도 했다. 김범수 센터장은 미국에서의 실패를 딛고 2009년 초 스타트업 바이콘을 인수해 카카오의 전신으로 삼았으며, 곧 아이폰 출시와 함께 날개를 달았다. 한때 시가총액이 27조원에 달했던 크래프톤(옛 블루홀스튜디오)도 2009년 1월 미국계 VC 알토스벤처스 등으로부터 85억원의 종잣돈을 투자받았다. 오늘날의 크래프톤을 있게 한 ‘배틀그라운드’는커녕, 그 이전 대작인 ‘테라’도 출시되기 전이었다. 하이브(옛 빅히트)는 논현동 한 건물 2층에 세 들어 살며 방탄소년단(BTS)을 키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은 유니콘(기업가치가 1조원이 넘는 비상장 스타트업)을 넘어 공룡이 된 이들의 성공담은 그저 ‘전설’이 아니다. 올해 암울한 한 해를 보냈을 우리 기업인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얘기다. 벤처 투자 정보 업체 더브이씨에 따르면, 올 한 해 벤처 투자 금액(1~11월)은 작년보다 56% 급감했다. 그야말로 반토막이 난 것이다. 이미 투자를 받은 기업들의 상황도 좋지 않다. VC 업계 베테랑들이 체감하는 스타트업의 몸값은 고점의 3분의 1 수준이라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미국 시장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데이터 분석 플랫폼 딜룸에 따르면, 전 세계 VC가 집행한 투자 총액은 3270억달러(약 406조원)로 추산된다. 지난해 투자금(5410억달러·약 698조원)과 비교해 대폭 줄어든 규모다. 2008년에 그랬듯 지금의 투자자들도 창업가들에게 “결과물, 즉 수익을 가져오라”고 재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사실만큼은 명약관화하다. 미국의 벤처 투자 시장은 2009년 바닥을 찍고 이듬해부터 힘차게 도약하기 시작했고, 한국 시장도 2008년을 저점으로 급성장해 왔다. 더 희망적인 건, 지금 곳간이 두둑하다는 것이다. 박용린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국내 벤처 투자 시장의 드라이파우더(투자 약정액 중 미집행 금액)를 최소 10조3000억원으로 추산한다. 지금 우리 기업들에 찾아온 겨울이 머지 않아 끝나리라는 긍정적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박 연구위원은 “결국 시기와 속도의 문제일 뿐 글로벌 VC 시장의 성장은 지속될 것”이라고 한다.

작은 사무실을 정리하고 귀국한 김범수 센터장은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얼마 뒤 자신의 운명이 바뀌리라는 상상조차 했을까. 2024년은 부디 많은 창업가가 반전을 꿈꾸며 힘찬 도약을 준비하는 해가 되길 희망한다.

[노자운 머니무브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