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산업화가 시작된 이후 한국의 온실가스 배출량이 줄어든 시기가 딱 한번 있었다. 바로 1998년 IMF 외환위기 때다. 1990년대는 한국 경제의 고도 성장 영향으로 온실가스 배출량이 연 평균 8.1%씩 늘어나던 시절이다. 그러다 외환위기 사태로 경제 성장이 꺾이고 공장이 멈추면서 온실가스 배출량이 전년 대비 14.1%나 줄었다.

외환위기라는 국가 재난사태가 역설적으로 온실가스 감축이라는 효과를 가져왔다. 반대로 생각하면 세계 각국이 추진하는 탄소중립 정책이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우려되기도 한다. 1998년 줄어든 온실가스(주로 탄소)가 약 7000만톤(t)이다. 문재인 정부의 탄소 배출 감축 목표에 따르면 2030년까지 2억4000만t 가량의 탄소를 줄여야 할 것으로 추산된다. 단순 계산으로 외환위기를 3.4번 겪으면 달성 가능한 목표다.

정부의 경기 부양책과 기업들의 녹색 인프라 투자 등에 힘입어 탄소중립이 경제 성장을 가져올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탄소중립이 자동차, 철강, 화학 등 특정 산업이나 관련 인프라 투자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에는 생존을 위협할 수준의 타격을 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선진국들이 경제 성장에 미칠 악영향을 무릅쓰고 오로지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탄소중립을 추진한다고 생각한다면 순진한 착각이다. 이미 통상 전문가들은 탄소중립 정책이 보호무역주의로 흐르고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최근 유럽연합(EU)은 해외 수입품 생산 시 배출된 온실가스 양을 고려해 세금을 부과하는 탄소국경조정제도를 도입했다. 미국에선 온실가스 배출이 많은 국가에서 생산된 제품에 수입 수수료를 부과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도 비슷한 제도 도입을 검토 중이다. 탄소중립이 ‘천사의 탈을 쓴 무역 장벽’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순진한 착각에 빠져있는 것인지 자국 산업 보호는 뒷전이고 탄소중립 목표만 몰아붙인다. 지난달 31일 더불어민주당은 야당의 반대에도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규정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 제정안을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기후위기대응법’으로도 불리는 이 법안은 2030년까지의 중장기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2030 NDC)를 2018년 대비 35% 이상으로 못박았다. 정부가 지난해 말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사무국에 제출한 2017년 대비 24.4% 감축 목표보다 상향 조정된 수치다.

“사회적 합의를 충분히 이뤘다”는 한정애 환경부 장관의 자평과는 달리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경제 5단체는 일제히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기업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고 반발했다. 중소기업들은 대기업에 비해 탄소중립에 대응할 여력이 부족하다며 이에 맞는 정책 수립이 필요하다고 건의했지만 역시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좌파 환경단체도 탄소중립 목표가 재벌기업 눈치를 보느라 후퇴한 법안이라고 비난하고 있다는 점이다. 환경부는 누구와 충분한 합의를 이뤘다는 것인가.

지난달 5일 대통령 직속 탄소중립위원회가 발표한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 초안도 마찬가지다. 재계에서는 “시나리오에 나온 탄소중립 목표가 실현 불가능하다”, “탄소중립에 활용하겠다는 기술들이 2050년 내에 상용화할지도 미지수다”라는 반응이 나왔다. “탈원전과 탄소중립은 양립할 수 없다”는 수많은 전문가들의 지적에도 시나리오에 ‘탈원전’을 고집스럽게 우겨넣었다.

탄소중립은 부정할 수 없는 시대의 요구다. 기업들도 탄소중립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와 민간이 소통하고 신뢰를 쌓고 현실 가능한 목표치를 공동으로 세우자는 것이 기업들의 목소리다. 그런데 정부는 시대의 요구에 응답한다고 국내 경제·산업 환경을 무시하고 당사자들의 의견에 귀닫는 채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탄소는 지구를 병들게 하지만, 탄소 배출을 줄이면 경제가 아프다. 선진국들의 탄소중립 정책에 보호무역주의가 불가결하게 따라오는지 문재인 정부는 생각해봐야 한다. 탄소중립이 가져올 경제 충격에 대비해 백신을 맞는 것이다. 코로나19 백신도 태부족인데, 우린 이런 경제 백신도 없다.

[송기영 재계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