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영 산업부 재계팀장

삼성SDI의 미국 전기차 배터리 공장 건립 임박 소식에 시장은 뜨겁게 열광하지만, 업계의 반응은 미지근하다. SK이노베이션(096770)이나 LG에너지솔루션에 비해 미국 진출이 늦은 삼성SDI는 장고 끝에 글로벌 4위 완성차업체 스텔란티스와 손잡을 것으로 전해졌다. 시장은 글로벌 4위, 세계 시장 점유율 9%라는 스텔란티스의 수식어에 열광하지만 전기차 시장에서 스텔란티스의 존재감은 ‘제로(0)’에 가깝다.

스텔란티스는 이탈리아-미국 합작사인 피아트크라이슬러(FCA)와 푸조·시트로엥 브랜드를 보유한 프랑스 PSA그룹 간 합병으로 올 1월 출범했다. 그룹 산하에 14개 브랜드가 있지만, 국내 소비자에게 그나마 낯익은 브랜드는 지프, 푸조, 마세라티 정도다. 그룹의 주력인 피아트와 크라이슬러는 한국 시장에서 고전하다가 2017년 철수했다. PSA와 합병하기 전 그룹의 전기차 모델이라곤 피아트 500e가 유일했다. 이마저도 유럽에서만 극소량 판매됐다. 냉정하게 말해서 삼성SDI는 글로벌 완성차 업체 중 전기차 전환이 가장 늦은 기업과 손 잡았다.

글로벌 4위의 ‘공룡 기업'이라지만, 사연이 있다. 크라이슬러는 2009년, 푸조는 2013년, 피아트는 2014년 각각 심각한 경영위기를 겪었고 결국 생존을 위해 합병을 통한 몸집 불리기를 택했다. 그동안 회사는 비용 절감에 집중했다. 전기차와 같은 신사업에 진출할 여력이 없었다. 신차 개발도 지지부진해 ‘기존 모델을 우려먹는다‘는 비판도 받았다. 합병 후 첫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카를로스 타바레스는 심지어 푸조에서 비용 절감 전문가로 유명했다.

삼성SDI가 지금이라도 스텔란티스와 손잡고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기엔 ‘삼성’이라는 이름이 갖는 글로벌 위상은 남다르다. 스마트폰, 반도체, 가전 시장에서 세계 1, 2위를 다투는 기업이다. 그런데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이 수십조원을 들여 미국에 공장을 건립하고 현지 완성차 업체와 협업할 때 삼성SDI는 미국 진출을 망설였다. 그 사이 글로벌 전기차 시장의 주도권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가기 시작했고,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천문학적인 돈을 전기차 개발에 쏟아붓고 있다. 스텔란티스는 이 붉은 바다에 이제서야 배를 띄운다고 한다. 업계에서는 “스텔란티스와 삼성SDI가 전기차 시장에서 자리 잡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국내 3위 전기차 배터리 기업인 삼성SDI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기차 최대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는 미국 진출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는 삼성전자의 미국 반도체 투자가 속도를 내지 못하는 상황과 오버랩된다. 삼성전자는 지난 5월 한미정상회담에서 미국 현지에 신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 건설에 170억달러를 투자한다고 발표했으나 두달이 지난 지금까지 어디에 지을지조차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멈칫하는 사이 경쟁사들은 쉼없이 달리고 있다. 세계 최대 반도체 회사인 미국의 인텔은 파운드리 3위 기업인 글로벌파운드리 인수를 추진 중이다. 인텔이 글로벌파운드리 인수에 성공하면 삼성전자의 시장 점유율 2위 자리를 위협하게 된다. 여기에 파운드리 업계의 압도적 1위(1분기 시장 점유율 55%)인 대만의 TSMC는 삼성전자와 초격차를 벌리겠다며 미국과 일본, 유럽 등지에 막대한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영시계가 멈춘 이유를 ’총수 부재’에서 찾는다면 “또 이재용 부회장 사면 얘기냐”고 따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재용 부회장의 사법 리스크가 계속되면서 삼성그룹의 대규모 투자가 중단되고 글로벌 인수합병(M&A)이 전무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혹자는 삼성전자가 올해 2분기 12조5000억원(연결기준)의 영업이익을 올려 역대 2분기 최대치를 기록한 것을 들어 ‘총수 부재 리스크는 없다’고 주장한다. 선장이 없다고 당장 배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것은 아니다. 총수 부재 리스크는 현재가 아닌 미래에 드러난다. 침몰하는 것은 지금의 삼성이 아니라 미래의 삼성이란 말이다. 주춤주춤 걷는 요즘의 삼성이 우려되는 이유다.

[송기영 재계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