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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까지도 고민하다가 어떻게든 피해를 변제하려면 시간을 벌어야 해서 도주했습니다.”

지난 16일 오후 서울남부지법의 한 법정. 하늘색 수의를 입은 40대 후반의 한 남성이 변호인석에서 일어나 최후진술을 시작했다. 일명 ‘라임 사태’의 주범 김봉현이었다. 그는 엄중한 법정 분위기와 열띤 취재 열기 속에서도 위축된 기색 없이 변호인 측에서 준비한 수십 가지 질문에 답했다.

김봉현은 2018년 10월부터 라임자산운용이 투자한 스타모빌리티 회삿돈을 비롯해 수원여객, 상조회 등 자금 1000억원 상당을 횡령한 혐의와 정치권과 검찰에 금품과 향응을 제공한 혐의 등을 받는다.

이날 재판은 김봉현의 도피로 두 달 넘게 미뤄진 결심공판이었다. 그는 2020년 5월 구속 기소됐다가 2021년 7월 ‘보증금 3억원, 주거제한, 도주 방지를 위한 전자발찌 부착’ 등을 조건으로 보석으로 풀려났다. 작년 11월 팔당대교 인근에서 전자발찌를 끊고 도주했다가 48일 만인 지난달 붙잡혔다.

김봉현이 법정에서 피해 복구를 운운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21년 보석을 신청할 때도 피해 회복과 합의금 마련을 위해 외부 활동이 절실하다고 했다. 김봉현은 2019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앞두고 5개월 간 잠적한 전력이 있지만 재판부는 재판이 장기화될 것을 감안해 두 달 뒤 보석 기회를 줬다.

그러나 보석 기간 김봉현은 지인들에게 불법 도박장 개설과 각종 이권을 약속하며 도주를 도와달라고 설득에 나섰다. 도주 기간 경기도 화성시 은신처에 숨어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 그가 피해 구제를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확인되지는 않는다.

김봉현은 11년 전 60억원대 공연투자 사기 사건의 책임자로 지목됐을 때도 ‘피해 회복’ 카드를 꺼냈다. 법정에서 피해 회복을 약속한 그는 피해자들에게 옥중 편지까지 보내며 합의를 종용했다. 결국 김봉현은 총 60억원대 사기 금액 중 3억원에 대한 횡령만 인정돼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당시 피해자들은 피해 복구를 위해 약속한 금액을 여전히 변제 받지 못한 상태다.

지난 16일 결심공판 직후 진행된 영장 심사에서 김봉현은 “이미 얼굴이 다 알려져 어디도 갈 수 없다”며 “시간을 주시면 피해 복구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다”고 재판부에 호소했다. 김봉현의 구속 기간 만료일은 다음달 2일, 선고 기일은 다음달 9일이다. 다음달 2일 전까지 구속영장이 재발부되지 않으면 선고일 전까지 또 다시 도주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

김봉현이 재판을 끄는 동안 라임 피해자들의 고통은 더해졌다. 사태의 본질을 알기 위해선 주범 김봉현에 대한 진실이 규명돼야 하는데, 이마저도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밝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은퇴 후 1억원이 넘는 노후 자금을 라임에 투자해 막대한 손실을 입은 한 투자자는 지난해 김봉현의 도주 소식을 접하고 “라임 사태의 몸통부터 놓치는데 봐주기 재판이 아니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라임 피해자들은 이 사태의 내막을 알고 싶다. 재판부가 더는 ‘피해 회복’이라는 거짓말에 넘어가 주범을 놓치지 않고, 사태의 실마리를 찾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