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회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박찬욱 감독의 미스터리 로맨스 '헤어질 결심'. '아가씨'에 이어 언어를 관능적으로 촉각화하는 박찬욱의 솜씨가 빛을 발한다. 현지에서는 K콘텐츠의 인기로 칸이 한국 영화 축제로 바뀌었다는 평도 나왔다.

봉준호가 ‘기생충’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던 2019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흥분했던 그날이 떠오른다. 자고 일어났더니, 온통 한국 영화 세상이 된 것만 같았다. 봉준호 감독은 송강호에게 자신의 종려 나뭇잎 트로피를 건네며 기어이 그 앞에 무릎을 꿇는 퍼포먼스까지 했다. “인내심과 슬기로움과 열정을 가르쳐준 대한민국의 모든 배우에게 이 영광을 바치겠다”고 했던 송강호의 말은 이미 2019년 5월에, 마법의 주문처럼 전 세계에 퍼져나갔다.

2022년 75회 칸 영화제에서 ‘헤어질 결심’과 ‘브로커’로 각각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받은 박찬욱과 송강호를 보니, 코리안 뉴웨이브는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된 느낌이다. 수상자로 호명되자 뤼미에르 극장 무대로 뛰어가는 송강호를 기쁨으로 얼싸안는 박찬욱, 박찬욱의 감독상 수상 소감에 객석에서 눈물짓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이 독특하게 아름다운 풍경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한국인이 만들면 전 세계가 본다’는 넷플릭스 CEO 리드 헤이스팅스의 말은 이제 과장이 아니다. 2019년 봉준호의 ‘기생충’에서 시작해서, 넷플릭스의 ‘오징어게임’, 애플TV+의 ‘파친코’로 이어지던 K 콘텐츠의 물결이, 그 시작점이었던 칸 영화제로 돌아와 ‘한국이 만들면 세계가 인정한다’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왜 세계인은 한국의 콘텐츠에 열광할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한국 영화 '브로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영화에는 중국 영화의 압도적인 색채와 스케일, 일본 영화의 집요한 탐미성, 인도 영화의 흥 같은 특유의 미학적 주인의식과 오리지낼러티가 없다.

한국 콘텐츠의 특징은 역동적인 리듬과 미묘한 블렌딩이다. 기술의 신세계나 철학의 경지, 완전히 새로운 플롯에 기반하지 않고, 기존의 이야기와 스타일을 가져오되 장르적 완성도는 높이고 현지의 생생함을 비벼 리얼한 맛으로 내어놓는 식이다. K 좀비처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아는 맛인데, 살짝 비틀어진. 그 0.5도 틀어진 미묘한 앵글, 딱 반 발짝만 대담해지는 자극, 엉뚱하거나 야릇하거나 스피디한 ‘코리안 팝 아트’의 지점에 한국 콘텐츠가 있다. 재료와 레시피를 잘 관찰해서 순식간에 잘 섞어내는 손맛이다.

‘데스 노트’와 ‘빚투’의 불안, 팬시한 세트와 코스튬을 섞어 만든 황동혁 감독의 ‘오징어 게임’이 대표적이다. 봉준호도 미야자키 하야오를 가슴에 품고 ‘옥자’를 만들었고, 김기영 감독의 ‘하녀’에서 ‘기생충’의 계급화된 괴저택의 영감을 받았다. 박찬욱의 ‘올드보이’는 일본 만화 원작이고, ‘박쥐’와 ‘아가씨’도 에밀 졸라의 ‘떼레즈 라캥’과 사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를 각색한 것이다.

다만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마틴 스코세이지의 믿음처럼, 기존의 레퍼런스를 비틀어 동시대적인 센스와 자기만의 세계관을 녹여냈다. 그렇게 공포와 웃음과 로맨스가 뒤섞인 채로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문법, 봉준호라는 장르, 박찬욱이라는 장르, 송강호라는 장르가 탄생한 것이다

73회 칸 영화제에서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쁨을 함께 나누고 있는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

봉준호가 우아하게 우직하고 한없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박찬욱은 어른스럽고 세련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낙천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송강호는 그 중간의 어딘가에서 어느 장단에도 맞춰 춤출 수 있는, 한마디로 박자 감각이 탁월한 리듬꾼이다. 진지한 가운데서도 어떻게든 ‘웃기고 싶어 하는’ 영화 예술가들의 욕심을 절묘하게 실현시키며. 배우이지만, 감독에게 끝없는 영감을 주고 이야기를 확장하는 ‘위대한 배우’로, 7번씩이나 칸의 대대적 추앙을 받으며.

더불어 봉준호가 아카데미에서 ‘1인치 언어의 장벽’을 언급한 이후로 ‘언어의 1인치’를 가지고 노는 한국 영화의 자신감은 더욱 진화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쓴 일본어 각본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한국 배우(송강호, 강동원, 이지은, 배두나, 이주영)가 연기한 ‘브로커’는, 따스한 대안 가족이라는 믿을만한 이야기에, 서로 다른 문화가 섞이는 미묘한 발화 지점들이 돋보인다. ‘헤어질 결심’은 탕 웨이가 구사하는 어둡고 눅눅하고 서툰 한국어가 박해일의 어딘가 시적인 울분이 배인 한국어 대사와 기묘한 충돌을 만들어낸다.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박해일의 형사 ‘해준’)”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탕웨이의 용의자 ‘서래’)”

이안 감독의 ‘색, 계’에서 중국어를, 김태용 감독의 ‘만추’에서 영어를, ‘헤어질 결심’에서 한국어를 구사하는 탕 웨이는 히치콕 적인 레이어로 촘촘한 박찬욱 영화에서 최고의 서스펜스를 일으킨다.

75회 칸 영화제에서 '헤어질 결심'으로 감독상을 수상한 박찬욱과 '브로커'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송강호. 영국 언론 가디언은 "한국이 기록적인 상을 휩쓸었다"고 보도했다.

현재 한국 콘텐츠는 지정학적으로 가장 핫한 ‘변방의 반도’라는 위치에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다. 한국의 포용력 있는 제작 시스템 아래 아시아 3국의 창작 소스가 자유자재로 섞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한국 영화 ‘헤어질 결심’과 ‘브로커’가 (권위는 있으나 지루했던)칸에 새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한국인이 만들면 다르다’는 믿음은 확신에 가까워 보인다. 넷플릭스, 디즈니 플러스, 애플+TV 등 OTT 업계도 한류에서 ‘출구’를 찾으며 한국은 점점 글로벌 콘텐츠 산업의 허브가 되는 모양새다. 우리 스스로 ‘유니버설’이 아닌 ‘글로컬’ 시대의 성실한 주인공임을 새록새록 자각하며.

생각해보면 극장이 고군분투하는 동안 코로나 인류는 변동성, 불확실성, 복잡성, 모호성의 시대를 지나왔다. 더이상 탁월함은 우월함이나 완벽함이 아니라 민첩함, 공감, 공명이라는 것을 몸으로 배웠다. 창작이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을 얼마나 잘 섞는가’에 있다는 데도 이견이 없다. 편견이나 편향의 무례한 뭉툭함 없이 오히려 다수와 소수의 문화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페이소스를 만들어내는 색다른 톤 앤 매너, 무엇보다 타자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함께 ‘잘 섞인’ 영화 생물이 탄생한다.

“영화마다 심혈을 기울이는 지점은 정확하게, 색다르게 찍어야 한다는 겁니다. 오랫동안, 여러 편의 영화를 찍어왔지만, 정확하게 찍는 것, 색다르게 찍는 것을 따로 하긴 쉬워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내는 게 어려운 일이지요. 대화든 섹스든 폭력이든, 어떤 장면이든 정확하게, 색다르게 하나가 되게 해내야 합니다.”-박찬욱(’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인터뷰 ‘아름답고 추악한 박찬욱이라는 세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