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텔아비브에 위치한 인텔의 스마트 빌딩. /로이터 연합뉴스

인텔의 반도체 생산 정책이 과거와 달리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들과의 적극적인 파트너십을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그동안 중앙처리장치(CPU) 등 주력 매출원을 자사의 생산시설에서만 고집해오던 인텔이 차세대 칩 생산 과정에서 파운드리 기업과 접점을 늘리면서 삼성전자, TSMC 등 파운드리 기업들에 새로운 ‘큰 손’이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겔싱어 CEO 시대에 확 달라진 인텔… 폐쇄적 생산방식 버렸다

지난 5일(현지 시각)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인텔의 공정 부문 수장인 앤 켈러허 수석부사장은 “인텔이 독자적으로 모든 것을 하려 하지 않고 대신 더 많은 업체와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며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으려 했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인텔이 (반도체 생산공정의) 모든 것을 주도할 필요는 없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업계에서는 팻 겔싱어 최고경영자(CEO) 부임 이후 인텔의 생산정책 기조가 타사와의 기술적 제휴에 좀 더 개방적인 방향으로 달라지고 있는 가운데 켈러허 부사장의 발언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반도체 종가로서 한때 세계 첨단 반도체 기술을 주도하던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삼성전자(005930), TSMC 등 선단 공정을 주도하고 있는 제조기업과의 협업을 시사한다는 해석도 나온다.

인텔은 그동안 주력 CPU를 포함한 대부분의 칩을 자사의 생산설비로 생산하고 일부 주변 부품이나 비주력 칩셋만을 외주에 맡겨왔다. 현재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는 인텔의 PC용 사우스브릿지(PC의 기능 확장을 위해 메인보드에 탑재되는 칩) 등 일부 부품을 위탁생산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픽처리장치(GPU) 물량 일부는 대만 TSMC 등에 맡긴 사례가 있기도 하다.

인텔 12세대 코어 프로세서 '엘더레이크'. /인텔 제공

◇삼성, TSMC가 만들면 인텔이 완성하는 ‘칩렛’… 공룡들간 협업 성사될까

최근 인텔이 세계 최대의 반도체학회 IEDM 2022 행사에서 공개한 차세대 반도체 패키징(후공정) 기술 시연에서도 타사와의 협업 가능성을 전제로 한 로드맵을 짐작하게 한다. IEDM에서 인텔은 다양한 ‘칩렛(Chiplet)’의 매끄러운 통합을 위한 3D 패키징 기술을 소개하며 데이터가 오가는 피치를 기존 10마이크로미터(um)에서 3um까지 줄일 수 있는 차세대 기술을 소개한 바 있다. 칩렛은 프로세서를 구성하는 작은 구성 단위로, 레고 블럭처럼 반도체 기판을 구성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인텔이 내놓은 이번 기술은 단순히 칩의 집적도와 성능이 높아지는 것뿐만 아니라 제조 과정에서 다른 업체들의 참여를 염두에 둔 것으로 업계는 해석했다. 인텔에 정통한 관계자는 “인텔이 이번 학회에서 공개한 3D 패키징 기술은 반도체 칩을 레고 블럭을 끼우듯이 구성할 수 있는 칩렛 기술을 더 고도화한 것이 특징”이라며 “가령 삼성에서 만든 블럭, TSMC에서 만든 블럭, 인텔이 만든 블럭을 하나로 통합하는 식으로 제조 공정을 다변화할 수 있는 방식을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9월 인텔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에서 개발자 행사인 ‘이노베이션2022′을 열고 삼성전자, TSMC를 비롯해 전세계 반도체 대표 기업 80여개와 함께하는 개방형 칩렛 생태계 ‘UCle’ 컨소시엄 출범을 선언하기도 했다. 해당 행사에 참여한 한진만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부사장은 “칩렛이 반도체의 미래”라고 화답하기도 했다.

인텔은 수십 년간 PC용 중앙처리장치(CPU) 중심으로 업계 선두를 지켜왔으나, 모바일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된 시장 변화에 제때 대응하지 못하면서 파운드리 시장 주도권을 대만 TSMC와 삼성전자에 내준 상태다. 인텔의 미세공정 전환이 늦춰지고 있는 가운데 특히 경쟁사인 AMD가 TSMC의 5나노 최첨단 공정을 바탕으로 시장점유율을 가파르게 끌어올리며 PC, 서버용 시장에서 인텔의 지위를 위협하고 있다.

한편 겔싱어 인텔 CEO는 지난 9일 방한해 경계현 삼성전자 DS부문장 사장과 만나 향후 파운드리 협력 등을 논의한 것으로 관측된다. 겔싱어 CEO의 한국 방문은 올해만 두 번째다. 겔싱어 CEO는 올해 5월에도 한국을 찾아 삼성전자와 차세대 메모리, 팹리스 시스템 반도체, 파운드리 등 반도체 분야와 PC·모바일 등 다양한 분야의 협력을 모색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