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와 2010년대 독일과 일본 메모리반도체 기업을 무너뜨린 ‘반도체 치킨게임’이 다시 시작되려고 한다. 당시 시장 후발주자인 대만과 일본 기업이 주축이 됐다면, 이번에는 메모리 1위 삼성전자발(發)이라는 점이 다르다. 반도체 침체 속에 시장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기 위한 차원으로 해석된다. 다만 이 과정에서 메모리 2위 SK하이닉스가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일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10월 PC용 D램 범용제품(DDR4 1Gb(기가비트)*8) 고정거래 가격은 2.21달러로, 전달 2.85달러 대비 22.46% 하락했다. 해당 제품 가격은 지난해 7월 4.1달러로 정점을 찍었는데, 절반 수준으로 추락한 것이다. 고정거래 가격은 기업 간 계약 거래 금액으로 D램익스체인지 측은 “상위 3개 D램 업체가 4분기 계약 협상에서 공격적으로 나서면서 경쟁이 3분기보다 치열했다”고 했다.

낸드플래시 가격도 약세다. 지난 6월 이후 5개월 연속으로 가격이 떨어지고 있다. 메모리카드·USB용 범용제품(128Gb 16G*8 MLC) 고정거래 가격은 10월 4.14달러를 기록, 전월과 비교해 3.73% 떨어졌다. 지난 2019년 9월 4.11달러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SK하이닉스가 개발한 176단 낸드플래시. /SK하이닉스 제공

업계는 메모리 가격 하락세가 적어도 내년 상반기까지 이어질 것으로 본다. 코로나19로 반도체 수요가 크게 늘어난 뒤, 설비 투자와 증산 등이 이에 맞춰 이뤄졌지만 올해 들어 글로벌 인플레이션 등으로 수요가 급감했고, 공급 과잉 상태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메모리 업체들은 원가 절감폭보다 가격 하락폭이 커, 팔아도 수익이 나지 않고 있다. SK하이닉스, 미국 마이크론, 일본 키옥시아 등이 감산과 투자 축소 등을 일제히 언급했다. 공급을 줄여 시장 상황을 다시 되돌려 놓겠다는 취지다.

다만 메모리 1위 삼성전자는 인위적인 감산은 없다고 밝혔다. 시장 공급 과잉이 계속되더라도 이미 원가 절감을 크게 해놨기 때문에 평소와 같은 생산 수준을 유지하고, 집행하기로 한 투자도 계획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2000년대와 2010년대 반도체 시장을 뒤흔든 ‘치킨게임’이 재현되고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 ‘1차 치킨게임’ D램 2위 독일 키몬다 파산

2007년 대만 D램 업체들은 점유율 향상을 위해 생산량을 늘리면서 극단적인 가격인하 정책을 펼쳤다. 시장 공급과잉에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겹치면서 당시 주력 512Mb(메가비트) D램 가격이 0.5달러 수준으로 하락했다. 3년 전인 2004년 해당 제품의 가격은 6.8달러였는데, 10분의 1 이하로 폭락한 것이다. 이 시기 1Gb DDR2 D램 가격도 0.8달러 수준으로 주저앉았다.

이 치킨게임으로 당시 시장 점유율 2위였던 독일 D램 제조사 키몬다가 파산했다. 2006년 인피니언의 자회사로 출범한 키몬다는 파산 직전 시장 점유율이 5%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키몬다는 2008년부터 순손실이 매출보다 커졌고, 2007년 3분기부터 2008년 4분기까지 누적 적자가 3조원 이상이었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낸드플래시 생산라인 등이 있다. /삼성전자 제공

당시 키몬다뿐 아니라 대부분의 메모리 제조사가 어려움에 빠졌다. 치킨게임이 절정이던 2008년 3분기 업계에서 삼성전자만 2400억원의 흑자를 냈고, 하이닉스(현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은 각각 적자를 기록했다. 이들은 그나마 규모의 경제가 가능한 대형 업체여서 피해가 적었다라는 얘기가 나왔다. 치킨게임을 주도했던 대만 업체인 파워칩과 난야 역시 적자를 피하기 어려웠다.

◇ ‘2차 치킨게임’ 日 엘피다 파산…삼성·SK·마이크론 빅3로 재편

2010년대 들어 다시 치킨게임이 벌어진다. 이번에도 대만 업체가 주도했다. 일본 기업들도 생산설비 투자를 선언하며 증산을 시작했다. 극단적으로 펼쳐진 출혈경쟁에 이 당시 주력제품인 1Gb DDR3 가격이 2010년 10월 1달러를 밑돌았다.

이번에 타깃이 된 회사는 일본 D램 업체인 엘피다였다. 당시 점유율 3위의 기업으로, 2011년 4분기부터 본격 적자 행진을 이어갔다. 엘피다는 1차 치킨게임 때도 2년간 2조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이 때문에 업계는 2009년 키몬다 파산 당시 엘피다의 동반 파산을 전망하기도 했다. 이를 막기 위해 일본 정부는 수천억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했고, 일본 은행권은 1조원 이상의 융자로 당시 엘피다를 살려냈다.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 /SK하이닉스 제공

엘피다는 2차 치킨게임 때 5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하게 된다. D램 가격 하락과 엔고(円高)가 겹친 탓이다. 파산 직전 엘피다는 영업이익률이 무려 -(마이너스)73%에 달했다. 경영을 이어가기 어려웠던 엘피다는 마이크론에 흡수됐다.

◇ 1위 삼성전자 “감산 없다” 메시지… ‘3차 치킨게임’ 시작되나

20여곳에 달했던 D램 업체는 두 번의 치킨 게임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이른바 빅3 체제로 재편된다. 2014년 반도체 시장 불황이 찾아오면서 다시 치킨게임이 예고됐으나, 출혈경쟁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당시의 경험으로 “공멸은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최근 반도체 시장 불황으로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 키옥시아가 감산과 투자 축소를 선언한 점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1위 삼성전자는 “인위적인 감산은 없다”고 밝혔다. 시장 가격이 하락한다고 해도 감산을 통해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맞추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이미 이뤄놓은 원가절감 능력이 상당하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한진만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부사장은 “(삼성전자의) 기본 전략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도 안정적인 수익을 확보하기 위해선 원가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으로 보고 여기에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라며 “그 결과 D램과 낸드플래시 업계에서 압도적 경쟁력을 가진 원가 구조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고 이 점은 강력한 장점이라고 자부한다”고 했다.

SK하이닉스 반도체 클린룸

업계는 삼성전자의 이런 입장을 ‘3차 치킨게임’으로 보고 있다. 시장 공급과잉 국면에서 ‘감산을 통한 수요 제한’, ‘감산 없이 경쟁’이라는 두 선택지 중, 삼성전자가 후자를 택했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투자 축소도 없다고 밝혔다. 한 부사장은 “업황과 연계해 설비 투자를 유연하게 대응한다는 기조는 그대로다”라고 했다.

◇ 인텔 낸드 인수한 SK하이닉스 첫 고비

삼성전자가 쏘아 올린 3차 치킨게임으로 메모리 2위 SK하이닉스가 피해를 입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인텔 낸드부문(현 솔리다임) 인수 이후 시장 2위로 올라선 SK하이닉스지만, 낸드 시장 전망은 D램보다 더 불확실하고, 회복성도 낮아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입을 모아 낸드 시황이 더 어려울 것으로 분석했다. 노종원 SK하이닉스 사장은 “D램은 복원력이 조만간 작동해 건전한 상태로 돌아갈 것으로 보지만 낸드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라고 했다.

솔리다임의 실적이 생각보다 살아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SK하이닉스의 고민이 크다. 미국 새너재이에 소재한 솔리다임은 부가가치가 높은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제품 개발, 생산, 판매를 도맡고 있다.

다만 SK하이닉스는 D램과 낸드를 함께 한다는 점에서 치킨게임의 파고가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라는 진단도 있다. 낸드 시황이 나빠도 D램으로 버틸 수 있는 체력이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일본 키옥시아, 미국 웨스트디지털, 중국 YMTC 등 낸드에만 집중해 구조적으로 취약한 이들 중 하나가 무너질 가능성이 점쳐진다. 이 중에서도 미국 제재가 불가피한 YMTC가 가장 유력해 보인다.

과거와 같은 치킨게임이 발생하지 않을 가능성도 업계 일각에선 제기된다. 삼성전자가 밝힌 ‘인위적인 감산’이라는 얘기를 근거로 한다.

삼성전자는 시설투자의 대부분을 D램 미세공정과 고적층 낸드 등 첨단공정 전환에 사용하는데, 이런 공정 전환 과정에서는 생산량 감소가 필연적이다. 즉, ‘인위적’ 감산은 없되, ‘자연스러운’ 감산은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황민성 삼성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의 경우 극자외선(EUV) 도입을 경쟁사보다 서둘렀지만 그만큼 전환과 수율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며 “이를 만회하려면 캐파(생산능력) 감소가 불가피하다”고 했다.

☞치킨게임(chicken game)

어느 한쪽이 이길 때까지 피해를 감수하고 경쟁을 벌이는 것을 의미한다. 치킨(chicken)은 ‘겁쟁이’를 뜻한다. 자본시장에서는 기업들끼리 저가 출혈 경쟁을 벌여, 경쟁자가 떨어져 나가면 남은 기업들이 시장을 차지하는 것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