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반도체 공급난이 지속되면서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반도체마저 부족하다는 우려가 나온다. 시설투자에 제아무리 수십조원을 책정해놔도 생산라인에 들어갈 장비 확보가 어려워 증설 자체가 힘들 수 있다는 것이다. 반도체 초격차를 이어가려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주요 기업도 예외는 아니라는 게 업계 설명이다.
최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반도체 장비의 리드타임(주문부터 공급까지 걸리는 시간)은 장비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대략 2~3년이다. 이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 초기 수개월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해 상당히 늘어난 것이다. 장비에 들어간 반도체까지도 공급난을 겪고 있는 탓이다. 이 때문에 이미 주문한 반도체 생산설비의 공급도 원활치 않다고 WSJ는 전했다.
반도체 검사장비 업체 어드밴테스트 아메리카 덕 르피버 최고경영자(CEO)는 “부품을 공급하는 데 차질을 빚어 리드타임이 두 배 이상 늘어난 상태다”라고 했으며, 세계 3대 반도체 장비 회사인 네덜란드 ASML의 피터 베닝크 CEO 또한 “내년까지 (장비)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는 현상이 이어질 것이고, 2025년이 돼야 해결될 것이다”라고 했다.
애초 업계는 반도체 공급난이 올해 말 종식될 것으로 예상했다. 지난 2년여간 갑자기 늘어난 반도체 수요에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지만, 곧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3위 톰 콜필드 글로벌파운드리 CEO는 “올해 안에 공급과 수요가 균형을 이룰 것이란 희망 섞인 기대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반도체를 만드는 반도체 장비 공급난은 조 단위 증설을 추진 중인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에 부담이 되고 있다. 특히 두 회사는 10㎚(나노미터·10억분의 1m) 첨단공정에 사활을 걸고 있고, 여기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노종원 SK하이닉스 사업총괄 사장은 “올해 반도체 장비 리드타임이 길어지면서 장비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라며 “10㎚급 D램과 176단 낸드플래시 양산 확대 일정이 연초 계획보다 일부 지연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한진만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부사장은 “장비 도입 리드타임이 길어지는 건 사실이고, 이런 부분을 고려해서 투자 기조를 수립해 집행하고 있다”라며 “EUV와 같은 새로운 기술을 도입해 개척하다 보면 일부 계획 변경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라고 했다.
삼성전자의 경우 현재 경기 평택캠퍼스의 제3라인(P3), 제4라인(P4) 모두 EUV 노광장비가 필요하다. 또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 제2 파운드리 공장 역시 5㎚ 공정이 도입될 예정이어서 EUV 장비를 공급받아야 한다. SK하이닉스의 경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착공 이전에 충북 청주에 공장 건립을 검토 중에 있다.
EUV 등 노광 장비는 반도체 생산 자체를 가리키는 전(前)공정에 들어가는 장비로, 장비 수급난은 생산된 반도체를 상품화하는 후(後)공정으로 번지는 중이다. 반도체 패키지 업계에 따르면 칩 조립과 테스트 등에 사용하는 장비의 리드타임 역시 평소 대비 2배 이상 길어졌다. 반도체 웨이퍼(원판)를 자르는 데 사용하는 절삭(소잉) 장비의 경우 최종 공급까지 최대 1년이 넘는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반도체 장비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반도체 산업은 연간 큰 폭으로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 글로벌 반도체 전체 매출은 사상 처음으로 5000억달러(약 640조원)를 넘었고, 2030년에는 이보다 2배 이상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올해 1분기 반도체 웨이퍼 출하량 역시 역대 최고치다. 업계 관계자는 “장비 공급의 차질은 단기간 해결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라며 “고도의 정보기술(IT) 시대로 전환되고 있는 만큼, 앞으로 반도체 수요는 늘어났으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