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SK텔레콤의 인공지능(AI) ‘누구(NUGU)’가 탑재된 태블릿이 경북 소재 아동보호전담기관 10여곳에 전격 투입된다. 상담사와 대화하는 아동의 말, 맥락, 말투, 목소리 톤 등을 읽어내 가정에서 학대 받은 징후가 있는지를 가늠해내는 미션을 맡게 된 것이다. 지난 3월 학대 의심 아동을 미리 보호하는 즉각분리제도가 시행되면서 감성을 읽을 수 있는 AI 기술이 ‘누구’와 시너지를 낸 덕분이다.

# 이런 ‘감성 AI’는 앞서 2019년 LG전자가 출시한 가정용 로봇 ‘클로이 홈’에 먼저 적용됐다. ‘클로이 홈’은 ‘누구’처럼 들을 수도 있지만 카메라로 얼굴 표정까지 잡아내 주인의 감정을 읽는다. 주인이 우울하다고 판단하면 프로그래밍된 유머를 건네는 식으로 ‘공감’ 기능까지 갖췄다.

영화 ‘그녀(Her)’의 음성 AI ‘사만다’를 현실화한 듯한 이런 기술을 만들어낸 주역이 있다. SK그룹과 LG전자가 각각 18%, 15%의 지분투자를 통해 기술 협력하고 있는 스타트업 ‘아크릴’ 박외진(49) 대표와 동료들이다.

지난 2일 오전 서울 강남구 본사에서 만난 박외진 아크릴 대표. /아크릴 제공

◇ ‘감성 AI’ 외길 10년…AI에 없는 ‘공감 능력’에 베팅

카이스트(KAIST) 전산학과를 졸업한 박 대표는 2011년 검색엔진 기술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던 중 미국에서 연구되던 감성 AI, 당시 용어로는 ‘감성 컴퓨팅(affective computing)’ 기술이란 걸 처음 접했다. 공감 능력은 인간의 전유물로만 여겨져 왔는데, AI가 이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의료·금융 등 대인 서비스 전반에 혁신을 가져올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박 대표는 매료됐다고 한다.

박 대표는 지난 2일 서울 강남구 본사에서 가진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감성 AI가 어떻게 ‘돈이 될지’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공부를 시작했다”라며 “당시 국내엔 공부할 만한 자료가 없어서 미국에 사는 지인에게 원서로 된 책을 받아 독학했다”라고 말했다. 2011년 카이스트 대학원을 졸업하자 마자 학교 선후배들과 아크릴을 창업하고 국산 감성 AI를 개발했다.

개발은 성공적이었지만 상용화는 쉽지 않았다. 국내 기업들에게 감성 AI가 유용하다는 걸 설득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박 대표는 “창업 직후 모 대기업 고위 관계자를 찾아가 ‘냉장고 같은 가전에 감성 AI를 접목하면 가족들이 서로의 감정을 매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지만 ‘우리 와이프는 내 감정에 그 정도로 관심은 없을 것 같다’라는 농담반 진담반의 답이 돌아왔다”라며 “여러 기업들을 만나봐도 기술의 효용성을 인정받기는 힘들었다”라고 했다.

기회는 2년 후인 2013년에 찾아왔다. LG전자가 유럽 수출용 스마트TV에 ‘웃고 싶을 때 보는 영화’ ‘오싹해지는 영화’ ‘힐링되는 영화’ 등 감정별로 영화를 추천해주는 기능을 넣으려 했던 것이다. 아크릴의 감성 AI가 꼭 해낼 수 있던 일이었다. 영화 한줄평을 AI가 읽고 그 영화를 보면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는지, 어떤 감정 상태에서 보면 좋은 영화인지를 수십 가지 감정 키워드로 분류해 맞춤 추천해주는 서비스였다.

◇ LG·SK가 인정한 기술…업그레이드 버전 ‘조나단’으로 상장·유니콘 눈앞

이를 계기로 LG전자는 2018년 아크릴에 지분 투자하고 이듬해 출시한 클로이 홈에도 감성 AI를 적용했다. 박 대표는 “LG전자는 ‘친구’ 콘셉트로 해당 로봇을 기획했는데, 친구 역할을 하기 위해 필요한 감성 인식 기술을 국내·외 3개 업체가 겨룬 결과 우리 아크릴의 것이 가장 뛰어난 걸로 평가돼 계약이 성사됐다”라고 했다. 그는 “당시 겨뤘던 업체 1곳은 감성 AI 기술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스타트업 ‘어펙티바(Affectiva)’였다”라고 덧붙였다.

LG전자의 가정용 로봇 '클로이 홈'. /AFP=연합뉴스

2018년 SK그룹도 아크릴의 지분을 인수한 데 이어 지난달 계열사 SK텔레콤과 아크릴이 경상북도·한국폭력학대예방협회(KAVA) 주관 사업에 아동학대 징후를 포착하는 시스템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고 박 대표는 전했다.

아크릴은 지난해 ‘예비 유니콘’으로 선정된 데 이어 내년 4분기 코스닥 시장 기술특례 상장과 2025년까지 유니콘 선정을 노리고 있다. 이를 위해 감정 인식만으론 사업 확장에 한계가 있는 AI 기술을 발전시켜 2017년 AI 플랫폼 ‘조나단’을 출시했다. 조나단은 19개의 서로 다른 AI 기술을 합친 ‘AI 패키지’로, 이 중 3개가 감성 AI를 전신으로 둔 공감 관련 기술이다. 아크릴은 이 AI 패키지를 기술 역량이 부족한 기업들에 판매하는 식으로 사세를 키우고 있다. 10년 전 박 대표를 포함해 7명이 시작한 아크릴은 현재 80명의 임직원을 두고 있다.

아크릴의 AI 사업 영역. /아크릴 제공

◇ 의료·건강관리·뷰티 ‘웰케어’ 집중 공략

아크릴은 조나단을 앞세워 의료·건강관리·미용·웰빙 등을 포괄하는 ‘웰케어’ 산업에도 진출하려 하고 있다. 아동학대 징후를 포착하듯 환자의 우울증을 진단하는 기술로, 정부가 추진하는 질병 진단·관리용 AI 의사 ‘닥터앤서 2.0’ 개발 사업에 지난 6월부터 참여하고 있다. 정신 건강뿐 아니라 신체 건강 관리에도 활용된다. 2018년 화상전문병원 베스티안재단과 업무협약(MOU)을 맺고 피부의 화상 정도를 이미지로 인식, 적절한 대처법, 인근 병원 안내 등을 해주는 AI 챗봇으로도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박 대표는 “웰케어를 발판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해 나갈 것이다”라며 “가령 다이어트 시 영양 상태 모니터링과 식단 조절, 운동 권고뿐 아니라 예민한 감정 상태까지 관리해주는 AI 헬스트레이너, 사람 직원들과 잘 어울려 지낼 수 있는 AI 인턴 직원 등으로 활용 가능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박 대표는 그러면서 “지난 10년의 노력을 발판으로 사람의 감정을 읽는 AI를 넘어 가장 사람다운 AI를 만들어 상용화하는 데 앞장서겠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박 대표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산업통상자원부 AI 관련 사업들의 예비타당성 기획 위원을 지냈고 현재 성균관대 컴퓨터공학과 겸임교수, 한국웰케어컨소시엄 회장, 한국지능의료산업협회 부회장을 지내고 있다.

서울 강남구 아크릴 본사 서버실에서 촬영한 박외진 대표의 모습. /아크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