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4월 12일 백악관에서 반도체·자동차·테크 기업 경영진과 화상 회의를 하며 반도체 핵심 소재 웨이퍼(둥근 원판)를 손에 들고 있다. /AP 연합뉴스

미국 백악관이 반도체 등 첨단 기술에 기반한 공급망이 대만, 한국, 일본 등 아시아에 몰려있는 것을 두고 “위험한 리스크(dangerous risks)”라는 표현을 썼다. ‘반도체 동맹’을 강화하겠다는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자국 내 반도체 생산력에 대한 우려를 여전히 갖고 있는 것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의 영문판인 닛케이아시아는 지난 15일 미국 정부 보고서를 인용해 “미국이 대만, 일본, 한국의 최첨단 반도체 기술 업체들을 중국과 함께 국가 안보에 대한 ‘위험한 리스크’로 분류했다”고 보도했다. 해당 보고서는 ‘회복력 있는 공급망 구축, 미국의 제조업 활성화 및 광범위한 성장 촉진’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8일(현지시각) 미국 백악관에서 발간한 것으로, 분량이 무려 250쪽에 달한다. 이 보고서는 미국 주요 산업 공급망의 어떤 부분이 취약한 지 구체적으로 담아냈다. 보고서가 가장 우려를 표한 산업군은 반도체와 배터리, 제약, 광물 등이다.

미국은 첨단기술 패권을 다투고 있는 중국을 가장 큰 위협으로 꼽았다. 그러나 전통적인 우방국인 대만, 일본, 한국 등도 위험요소로서 언급했다. 특히 아시아권 국가에 반도체 제조와 소재 대부분을 의존하는 것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기도 했다.

미국은 대만의 경우 중국과의 불안한 정치 관계를 위협으로 분류했다. 보고서는 “대만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분쟁이나 금수조치가 미국 산업에 큰 영향을 줄 수 있고, 공급망 회복에 장기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했다. 실제 미국은 대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TSMC에 대부분의 반도체 생산을 의존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점유율은 TSMC가 56%로 1위다.

일본은 반도체에 필요한 소재 대부분을 생산한다. 특히 전 세계 포토레지스트(감광제)의 90%가 일본산이다. 반도체 원판인 실리콘 웨이퍼도 일본이 높은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보고서는 ‘한국’과 ‘삼성전자’도 높은 빈도로 언급했다. 각각 51회, 35회 보고서에 등장한다. 주로 최첨단 기술에 대한 내용이다. 다만 삼성전자에 대해 백악관은 후한 평가를 내렸는데, 보고서는 “삼성전자는 다양한 반도체 제품을 생산하고 있으며 로직, 메모리, 이미지 센서에서 경쟁우위를 가지고 있다”며 “7㎚(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와 5㎚ 반도체를 생산하는 몇 안 되는 회사 중 하나다”라고 했다. 또 “삼성전자는 제조 능력을 높이기 위해 제조와 기술 우위를 이용하고 있어 기술 분야 리더십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고 했다.

미 백악관 보고서는 자국 내 반도체 제조 기업이 없다는 점에서도 불안감을 드러냈다. ‘반도체 제작 리스크’ 항목에서 보고서는 “미국은 현재 최신 반도체 공정에서 반도체 생산 능력이 부족하다”며 “지금은 대만의 TSMC와 한국의 삼성전자만 5㎚ 미세공정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다”고 했다.

현재 미국의 가장 큰 리스크(위험)도 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부각하고 있다. 보고서는 “미국의 가장 발전된 팹(공장)은 10㎚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인텔뿐이다”라며 “인텔은 2023년이 되어도 제대로 된 7㎚ 반도체를 생산할 수 없어 지난 1월 TSMC에 파운드리를 맡기는 방안을 발표했다”고 했다.

실제 미국 반도체 산업은 팹리스(반도체 설계 기업)에 집중돼 있다. 인텔 외에는 반도체 설계와 제조가 동시에 가능한 기업이 없다. 퀄컴, 엔비디아, AMD 등은 칩 설계만 하고, 생산은 TSMC와 삼성전자에 떠안기고 있다.

앞으로 반도체 분야는 5세대 이동통신(5G),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AI), 네트워크, 클라우드 등의 발달로 고성장이 예고되고 있다. 그러나 자국 내 반도체 생산, 공급망이 없는 미국은 자칫 아시아권 나라에 반도체 공급 주도권을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가 상당하다. 보고서는 “미국 안에서 최첨단 기술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국가 안보에도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한편, TSMC는 최근 미국 애리조나에 120억달러(약 13조4000억원) 규모의 파운드리 팹 착공에 들어갔다. 또 삼성전자는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에 20조원 규모의 투자를 진행하겠다고 결정했다. 삼성전자의 투자 장소는 미국 텍사스 오스틴이 유력하지만 애리조나주, 뉴욕주 등과도 협상을 진행 중이다. TSMC와 삼성전자의 미국 내 투자는 바이든 행정부의 ‘공급망 재편’ 전략에 따른 것이다. 인텔 역시 바이든 행정부 전략에 발맞춰 지난 3월 파운드리 사업 진출을 선언하고, 22조원을 들여 애리조나주에 두 개의 반도체 제조 시설을 짓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