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자동차 전장 사업재편에 나섰다. 그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전장사업의 전열을 가다듬어 제대로 된 사업을 해보겠다는 것이다.
4일 전장 업계와 삼성전자 등에 따르면 지난 2014년 경영전면에 나선 이재용 부회장은 그룹의 미래 먹거리 중 하나로 전장사업을 점찍고, 2015년 12월 경영지원실 직속의 전장사업팀을 꾸렸다. 이어 2018년 당시 국내 인수합병(M&A) 사례로는 가장 큰 규모였던 10조원에 글로벌 자동차 AVN(오디오·비디오·내비게이션) 시장 1위인 하만을 인수했다.
당시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의 행보를 두고 ‘게임체인저가 등장했다’는 평가를 내놨다. 과거 완성차 제조업에서 한 번 쓴맛을 보긴 했지만, 반도체·스마트폰·디스플레이 등에서 글로벌 수위에 있는 삼성전자가 전장에 뛰어드는 순간 업계 구도가 단숨에 바뀔 수 있다는 기대가 컸던 것이다. 하지만 만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삼성전자는 자동차 전장분야에서 뚜렷한 발자국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삼성전자 전장사업팀과 제품생산·판매를 맡은 자회사 하만의 시너지가 크지 않았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
실제 하만은 인수 이전과 비교해 외형은 늘었지만, 수익성 개선은 더딘 상태다. 지난해의 경우 매출 9조1800억원, 영업이익 600억원을 기록, 전년 대비 매출은 9%, 영업이익은 81.25% 감소했다. 지난해 1분기와 2분기에는 각각 1900억원, 900억원의 영업손실을 내 삼성이 인수한 이후 가장 저조한 성적표를 받기도 했다. 다만 하반기인 3분기와 4분기 각각 1500억원, 1800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적자는 면했다. 하만은 삼성전자에 인수되기 전인 2016년 매출은 약 8조원, 영업이익은 약 6800억원을 기록했는데, 지난해 영업이익은 당시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 수치다.
삼성전자는 자동차 서플라이 체인(부품 공급망)에 들어가는 일도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만의 경우 기존의 서플라이 체인을 유지하고 있으나, 첨단 운전자 주행보조시스템(ADAS)용 반도체 분야에서 삼성전자는 신생 업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삼성전자는 독일 아우디가 만드는 준중형 세단 A4에 자동차용 인포테인먼트 프로세서 ‘엑시노트 오토 8890’을 공급한 일을 제외하면 글로벌 완성차 공급 실적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동차 서플라이 체인에 진입하려면 장기간 자동차 회사와 부품사 간 신뢰가 쌓여야 한다. 안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동차 부품의 경우 높은 수준의 내구성과 안전성이 담보돼야 하는데, 몇 년간의 기술 개발로는 완벽한 신뢰를 형성하기 어려운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는 글로벌 1위를 다투는 전자기업이지만 자동차 업계에 있어선 신뢰도가 검증이 되지 않은 신생 기업에 불과하다”며 “혹한과 혹서를 동시에 견뎌야 하고, 한 번 장착되면 10년은 고장나는 일이 없어야 하는 자동차 부품의 특성상 완성차 기업들은 삼성전자의 부품을 쉽게 장착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다품종 소량생산에 대한 이해가 적었던 점도 삼성전자 전장의 부진 원인으로 꼽힌다. ADAS용 프로세서 등을 비롯한 자동차용 반도체는 완성차 업체가 요구하는 성능과 기능을 반영해 맞춤형으로 공급해 줘야 하는데, 삼성전자는 그간 메모리 반도체 등 소품종 대량생산에 익숙해 충분히 대응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올해 초부터 삼성전자는 전장사업 재정비에 나섰다. 수장을 교체하고 조직을 통합하는 방식으로 효율성을 높이고, 사업 집중력을 높이려고 하는 것이다.
먼저 전장사업팀장에 이승욱 사업지원TF(태스크포스) 부사장을 앉혔다. 하만 전장 부문장에는 글로벌 1위 자동차 부품업체인 독일 보쉬의 최고경영자(CEO)를 역임했던 크리스천 소봇카를 선임했다.
이어 삼성전자는 반도체를 담당하는 DS(디바이스솔루션)부문의 부품플랫폼사업팀을 없앴다. 이 조직은 자동차용 프로세서를 주력해 온 DS 내 독립 사업팀으로 지난 2017년 생겼다. ‘A-프로젝트팀’이라고 불렸던 시스템LSI내 프로젝트 조직도 해체됐는데, 여기선 엑시노트 오토와 자동차용 이미지센서인 아이소셀 오토의 설계를 전담했다. 삼성전자는 이들을 해체하고 재결집해 시스템LSI 사업부 내 커스텀SoC(시스템온칩) 전담 조직을 만들었다.
커스텀SoC는 고객사 맞춤형 통합칩을 만드는 것으로, 삼성전자가 직접 반도체 설계부터, 생산까지 모두를 지원하는 ‘올인원(All-In-One)’ 서비스를 지향한다. 업계 관계자는 “단순 부품이었던 AP를 공급한 것을 넘어 전체 솔루션까지 공급하겠다는 것”이라며 “예를 들면 현재 테슬라 전기차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만들고 있는 삼성전자가 자율주행 모듈까지 통째로 만들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자동차용 반도체 서플라이 체인에 진입하느냐는 것이다. 업계는 삼성전자가 자동차용 반도체 기업을 인수해 해결할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고 있다.
가장 유력한 후보로는 네덜란드의 NXP, 미국의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 스위스의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등이 꼽힌다. JP모건 등은 NXP가 가장 인수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NXP는 자동차 전력을 제어하는 반도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자동차 반도체 시장에서 1, 2위를 다투고 있다.
다만 NXP의 기업가치가 70조원에 달하는 점을 고려한다면 인수 자체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하만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덩어리라는 것이다. 또 삼성전자의 NXP 인수를 우려하는 각국이 독점을 우려해 합병 승인을 내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반도체 자립 정책에 따라 미국 내 투자 압박을 받고 있는 삼성전자가 미국 기업인 TI를 선택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사업 방향과 정치적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는 셈이다. 이와 관련해 삼성전자 관계자는 “자동차 반도체 업체 인수와 관련해 회사 내부에서 정해진 바는 없다”라며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미국 기업을 인수한다는 건 추측에 불과하다”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어쨌든 전장 사업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조직을 개편하는 것은 맞다”라며 “멀리 내다보고 사업을 준비 중에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