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대만이 중국 내 자동차용 반도체 공장 증설 투자를 놓고 자존심 싸움을 벌이고 있다. 대만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 TSMC는 중국 난징 공장에 3조원대 투자를 하기로 했는데, 중국에서는 최첨단 미세공정이 아니라며 투자를 거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 때문에 중국에 초미세공정을 건설 중인 삼성전자가 수혜를 입을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3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TSMC는 지난달 23일 이사회를 열고 중국 난징 공장에 28억8700만달러(약 3조2000억원)를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공급 부족을 겪고 있는 자동차용 반도체 생산을 늘리기 위해 생산 라인을 증설하겠다는 것이다. TSMC가 난징 공장에 증설하는 자동차용 반도체는 회로 선폭 28㎚(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으로, 이르면 올해 말부터 생산이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TSMC는 12인치 웨이퍼 기준 월 4만장을 생산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TSMC의 투자 결정에 먼저 반응한 건 대만 정치권이다. 반중 성향의 일부 정치인들이 TSMC의 산업 기밀이 중국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투자에 반대하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대만중앙통신(CNA)은 지난달 25일 “중국이 대만의 반도체 기술과 인재를 빼가고 있다는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며 “대만노동부가 채용정보 사이트에 중국 업체의 구인 광고를 받지 말도록 지시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라고 보도했다.
그러자 중국에서도 TSMC의 투자 결정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TSMC가 28㎚ 공정의 반도체를 생산, 공급할 경우 자국 업체들이 도태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여기에 10㎚ 이하의 첨단 미세공정이 아닌 성숙공정인 28㎚ 공정을 증설하는 것에 대한 불만도 강하다. 중국 정보기술(IT) 전문가 샹리강은 “중국 정부가 TSMC의 난징 공장 확장 계획을 중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서 눈길을 끌었다. 그는 “TSMC는 미국엔 120억달러(약 13조5000억원)을 들여 5㎚ 반도체 생산 라인을 건설하면서 중국에는 고작 28억달러(약 3조원)을 들여 28㎚ 공정을 지으려 한다”며 “이는 중국을 선진 기술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전략의 일환이다”라고 했다.
이와 관련해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지난 1일 “TSMC가 미국 제재를 이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대만 반도체 업체에 대한 중국 내 인식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며 “28㎚ 공정 제품을 생산하는 난징 공장은 TSMC의 최첨단 공장보다 최소 두 세대 이상 뒤처진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전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이번 일을 계기로 중국이 TSMC에 대한 제재에 나설 수 있다고 보고 있다. TSMC가 중국 대표 중국 정보통신기술(ICT)기업인 화웨이에 반도체 공급을 중단하는 등 사실상 미국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TSMC는 이달 초 미국의 제재 명단에 오른 화웨이와 파이티움, 선웨이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등에 대한 반도체 공급을 중단하기로 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중국은 그동안 미국의 반도체 패권 경쟁에 사실상 침묵했는데, 글로벌 반도체 업체들을 압박하는 방법으로 미국에 대한 견제를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라며 “국가 간 반도체 패권 경쟁이 고조될수록 업체들을 향한 압박도 거세질 수 있다”고 했다.
다행히 국내 반도체 업계를 대표하는 삼성전자는 이런 압박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상황이다. 삼성전자는 10년 전 중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시안에 대규모 낸드 공장을 건설했는데, 현재는 80억달러(약 9조5000억원)를 추가로 투자해 2단계 증설을 진행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중국의 TSMC 견제로 삼성전자가 이득을 볼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삼성전자가 시안 공장에 건설 중인 생산 라인에는 10㎚급 첨단 공정이 적용되는데, TSMC의 28㎚공정과 비교되면서 중국 내 삼성전자 파운드리 경쟁력 확대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중국에 대한 미국의 견제가 계속될 경우 삼성전자 역시 중국 업체에 대한 공급 제한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미국이 중국으로 반입하는 반도체 장비에 대한 제재를 강화할 경우 삼성전자는 중국 공장을 첨단화하는 데 지장이 생길 수 있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는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 경쟁이 고조될 경우 삼성전자의 시안 공장 장비 투입이 어려움을 겪는 등 다양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정부가 나서 외교적인 방법으로 이런 문제들을 풀어줘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