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실리콘 웨이퍼가 전시돼있다. /뉴스1

“반도체 가격이 올라도 너무 올랐어요. 대기업은 몰라도 영업 이익률이 10% 안팎인 중소기업들은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경영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국내 의료기기 업체 관계자는 최근 업계 사정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미국 달러화 강세와 원자재 가격 폭등에 반도체 수급 불안까지 겹치면서 국내 의료기기 업체들이 영업에 차질을 빚고 있다. 일부 업체들은 생산 중단까지 고려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런 상황이 길어지면 국내 중소업체 대부분이 폐업할 수 있다는 위기감도 보인다.

19일 업계에 따르면 의료기기 업체 A사는 지난해 말 개발한 신제품을 올해부터 판매하려고 했던 계획을 대폭 수정했다. 생산에 필요한 반도체 가격이 몇 개월 새 몇 배씩 뛰면서 양산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다.

A사는 기존에 미리 확보해 둔 반도체 재고로 생산 가능한 수량인 2만 대까지만 제품을 생산하고, 추가 생산은 하지 않기로 했다. A사 대표는 “중국 직수입 반도체 가격이 종전 개당 4달러에서 최근 14달러로 3배 넘게 뛰었다”며 “반도체 값이 크게 오른 현 시점에는 생산 중단 밖에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전자기기에 쓰이는 반도체는 크게 ‘메모리반도체’와 ‘시스템반도체’로 나뉜다. 메모리반도체는 정보를 저장하는 반도체로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USB 등 각종 저장장치를 만드는 데 쓰인다. 시스템반도체는 연산, 추론 등 여러 방법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 등에 들어가는 CPU, 의료기기를 만드는 데 시스템반도체가 사용된다.

그런데 최근 전 세계적 물가 상승 등에 따른 소비 위축으로 컴퓨터, 스마트폰 등 IT기기 판매량이 줄면서 IT기기용 CPU 생산에 필요한 시스템반도체는 물론, 저장장치에 쓰이는 메모리반도체 가격까지 떨어지고 있다. 반면 코로나19로 의료기기 수요가 증가하면서 의료기기 생산에 필요한 시스템반도체 가격은 상승세에 있다.

여기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공급망 불안이 가중되면서 의료기기용 반도체 수급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고 있다. 심폐 진단용 의료기기 업체인 B사 대표는 “반도체 공급 업체가 1년 전 만해도 주문을 하면 3~4개월 안에 물량을 보낸다고 했는데 최근에는 그 기간이 1년 반까지 늘었다”라고 했다.

업계에선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국내 의료기기 중소기업이 줄도산할 수 있다고 본다. 의료기기 업체 관계자는 “대다수 중소업체들은 영업이익률이 10% 안팎이기 때문에, 반도체 등 원재료 가격 상승이 치명적이다”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경기 불황으로 제품 판매량까지 줄어들면 경영을 포기하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대기업이라면 공급처가 많고 자금력이 있으니 버틸 수 있겠지만 중소기업은 그럴 여력이 없다”라고도 말했다.

글로벌 반도체 가격은 한동안 계속 오를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생산용 특수가스를 생산하는 일본’쇼와덴코’의 소메미야 히데키 최고운영책임자(COO)는 인터뷰에서 “반도체 원재료 가격이 올해에만 12차례 인상됐다”며 “적어도 내년까지는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전체 시장 상황과 별개로 의료기기 시장 반도체 수급 상황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반도체 제조사들은 한 해에 최소 10억 대씩 팔리는 스마트폰 산업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라며 “의료기기 산업은 반도체 공급 우선순위가 낮아 수급난이 더 늦게 풀릴 수도 있다”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