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의료기기 전시회 '메디카 메세'에 출품된 뇌 질환 여부 측정기.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AP통신

인공지능(AI) 심층학습(딥러닝) 기술로 진단 소프트웨어를 개발 중인 A사는 최근 혁신의료기기 지정을 시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혁신의료기기로 지정받으려면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가 요구하는 서류를 만들기 위해 많은 인력과 시간을 써야 하는데, 그에 따른 혜택은 적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혁신의료기기 지정을 굳이 시도하지 않으려는 업계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올해로 시행 3년차에 접어든 식약처의 ‘혁신의료기기 지원 사업’에 대한 업계 회의감이 커지고 있다. 혁신의료기기 지원 사업은 새로운 기술로 만들어진 의료기기 중 정부로부터 혁신성, 안전성, 사업성 등을 인정받은 기기들을 혁신의료기기로 지정해 빠르게 제품화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다. 국내외 첨단 의료기기 시장을 선점하고 국민이 더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자는 취지로 시행했다.

4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최근 의료기기 제조사들 사이에선 혁신의료기기 지정을 시도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커지고 있다. 자료 제출과 각종 심사 등 과정을 거쳐 식약처에 혁신의료기기 지정을 받아도, 그 혜택은 “식약처 답변 속도가 빨라지는 것뿐”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식약처는 지난 2020년 5월부터 ‘의료기기산업 육성 및 혁신의료기기 지원법’을 시행했다. 혁신의료기기 지정을 받으려면 회사는 ▲제품 개발 경위 ▲사용 목적 ▲작동 원리 ▲사용 방법 ▲성능 ▲국내외 유사제품 사용 현황 ▲제품 혁신성 등 7개 항목에 해당하는 자료를 식약처에 제출해야 한다. 이 자료를 보건복지부, 식약처,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이 검토한 후 혁신의료기기 지정 여부를 결정한다.

혁신의료기기로 지정되면 제품 개발을 하면서 식약처 허가 과정도 함께 진행할 수 있다. 이러면 시장에 내놓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크게 줄어든다. 일반 의료기기는 제품 개발을 끝낸 뒤에야 허가 절차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도 회사와 식약처가 훨씬 빠르게 소통할 수 있다는 건 혁신의료기기의 확실한 장점이라고 평가한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오송 본부. /식품의약품안전처 제공

다만 이것 외엔 별다른 장점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A사 관계자는 “식약처 답변 속도가 빨라진다는 것 이외엔 어떤 장점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한정된 인력과 시간을 서류 작업에 쓰느니 제품 성능 개선에 집중하는 게 훨씬 낫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업계에서도 (혁신의료기기 지정이) 굳이 필요 없다는 의견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혁신의료기기로 지정된 제품을 시장에 내놔도 건강보험 급여 적용을 받지 못하면 수익을 내기 힘들다. 첨단기술로 만든 값비싼 제품이기 때문에 환자들이 가격을 전부 부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혁신의료기기 지원법에 급여화 관련 혜택은 전혀 없다.

이 때문에 혁신의료기기를 출시한 지 1년이 넘게 지난 상태에서 회사가 경영난에 시달리는 일도 나온다. 진단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인 B사의 한 제품은 2020년에 혁신의료기기로 지정됐고, 이듬해 식약처 허가를 받으며 시장에 나왔다. 이후 1년이 지났으나 아직 수익이 거의 없는 상태다. 올해부터는 적게나마 돈을 벌고 있지만 작년 매출은 0원이었다고 한다.

B사 관계자는 “혁신의료기기 사업은 사실상 반쪽짜리 제도다”라며 “의료기기는 급여화까지 돼야 환자들이 제대로 쓸 수 있는데, 혁신의료기기 제도는 시장 출시 이후 급여화 문제에 있어선 어떤 혜택도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혁신의료기기라는 이름값이 주는 홍보 효과도 떨어지는 추세다. 몸에 입을 수 있는(웨어러블) 의료진단기기를 개발 중인 C사 대표는 “제도 시행 초기에는 제품 홍보, 투자유치 등을 노리고 혁신의료기기 지정을 시도하는 회사들이 있었지면 최근엔 별로 보지 못했다”며 “혁신의료기기로 지정된 덕에 큰 성과를 봤다는 회사가 별로 없다 보니 마케팅 효과가 떨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3년여간 19개 기기가 혁신의료기기로 지정됐는데 신청 건수는 이날 기준 102개다.

식약처 관계자는 “지금의 혁신의료기기 지원법은 시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큼 의료기기 개발과 제품화라는 단계에 집중돼 있다”라며 “의료기기산업이 성장하려면 제품이 급여화되고 회사들이 수익을 내야 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지원책도 고민 중인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현재 복지부, 식약처, 심평원 등이 의료기기산업 육성을 위한 5개년 계획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