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1980년대 사우디아라비아와 리비아 등 중동에서 우리 건설노동자들이 흘린 땀과 눈물은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초고속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그런데 중동 건설현장의 경제 기여도를 생각하면 국내 중동 연구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국제회의를 위한 아랍어 통역을 구하기도 쉽지 않으니 말 다했다.

이권형(왼쪽)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세계지역연구센터 소장과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교수. /이태경기자

이권형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세계지역연구센터 소장과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교수는 척박한 국내 중동연구 분야의 발전을 견인하는 쌍두마차 역할을 해왔다.

이 소장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대(SOAS)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중동 경제 전문가다. KIEP 합류 이전에는 기아경제연구소에서 자동차산업을 연구하기도 했다.

캐나다 맥길대에서 이슬람학 석사, 이란 테헤란대에서 이슬람학 박사학위를 받은 박 교수는 국내 손꼽히는 중동 정세, 이슬람 문화 전문가다. 외교부 정책자문위원과 법무부 국가정황정보 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다.

격변하는 중동 시장에 대한 의견을 듣기 위해 두 전문가를 지난달 23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의 한 카페로 초대했다. 워낙 오랫동안 서로 알고 지낸데다, 중동이 국내에서 다시 ‘기회의 땅’으로 주목 받으면서 학술행사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이 늘어서인지 어색한 느낌은 없었다(박 교수는 이 소장과 같은 직장에 다니는 기분이라고 했다). 공교롭게 둘 다 얼마전 다녀왔다는 UAE 두바이와 아부다비를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이전 방문과 느낌이 어떻게 달랐나.

이권형(이하 이): 3~4년 전만해도 두바이 경제가 좋지 않다. 공실률 높다는 이야기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공실률이 많이 낮아졌고, 부동산 가격은 올라간 상태다. 공사 현장도 많이 보였다.

박현도(이하 박): 두바이 가면 항상 한국분이 운영하는 호텔에 묵는다. 코로나19로 힘들어 보였는데 이번에는 빈 방이 없었다. 이웃 카타르에서 월드컵이 열리면서 두바이가 반사이익도 누렸지만, 유가가 높게 유지된 덕분에 경제 회복 속도가 빠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중동이 투자처로 각광 받으면서 역내 경쟁도 치열해졌다. 대표주자 격인 사우디와 UAE의 경쟁력을 비교하면?

: UAE에서 뭔가 한다고 하면 중동 다른 나라에서도 ‘좋은 것’ ‘믿을만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걸프 국가 중 가장 앞서가고 신뢰 받는 나라가 UAE다. ‘중동의 독일’이라고 할까? 그런데 UAE를 비롯한 중동 산유국이 쉽게 자금을 댈거라고 생각하고 섣부르게 덤비면 곤란하다. 기술이전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이 소장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대(SOAS)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중동 경제 전문가다. /이태경 기자

: 사우디 인구는 약 4000만이고 UAE는 1000만인데, 그중 자국민 비중은 15% 정도에 불과하다. 사우디는 중후장대한 산업을 일으키려 하는 욕심이 크지만 정책 변화가 느리다. 반면에 UAE는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개인적으로 UAE가 전 세계에서 한국 모델을 가장 잘 따라가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UAE는 마치 우리나라의 1970년대 처럼 ‘국산화’를 강조한다. 현지 인력을 투입해 현지 생산을 늘리는 게 목표다. 석유 판 돈 투자해서 수익을 얻기 원할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곤란하다.

중동은 과거에도 유가가 오를 때마다 활기를 띄었다. 사우디의 ‘네옴시티’ 프로젝트도 2017년에 발표된 건데 잠잠하다가 유가가 오르니 다시 주목받고 있다.

: 우리가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다. 너무 올인해도 곤란하고 유가와 국제정세 흐름을 봐가며 움직여야 한다. 국제유가가 높게 유지되고 있는 건 코로나19 팬데믹(전염병의 세계적인 대유행) 관련 규제가 풀리면서 수요는 늘고 공급은 부족한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터졌기 때문이다. 평화협정이나 휴전협정 등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상황 변화에 따라, 혹은 교착 상태에 빠진 이란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 결과에 따라 (이란산 원유 공급이 늘면) 유가가 다시 내려갈 가능성도 있다. 이런 부분을 잘 살펴야 한다.

: 우리는 네옴 관련 공사를 부분적으로 수주하고, 전체 공사는 중국이 맡게될 것으로 보는 의견이 많다. 전체 공사에 약 30만명의 노동자가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데. 그걸 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는 중국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경우 위안화로 원유 거래가 이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난해 12월 9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중국-걸프협력회의(GCC) 기조연설에서 “향후 3~5년 내 GCC 국가로부터 석유와 천연가스 수입을 늘리고 위안화로 결제할 것”이라며 “GCC 국가들은 석유와 위안화 결제를 위해 상하이 석유·천연가스 거래소(SHPGX)를 충분히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제사회에서 1974년 석유 파동 이후 원유 결제는 미국 달러화로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 같은 ‘페트로 달러’ 체제는 달러가 글로벌 통화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만들어준 핵심 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탈석유에 대한 절박함은 크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사우디의 경우 실세인 무함마드 빈 살만(37) 왕세자가 젊은 지지층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변수일 것 같고.

: 사우디는 전체 인구의 67%가 35세 이하다. 그러니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빈 살만 왕세자는 원래 생각이 많고 상상력이 풍부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난 그들보다 더 가진 것이 많다. 아이디어만 있다면 변화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말을 한 적도 있다(빈 살만 왕세자는 우리 돈 약 2500조원이 넘는 재산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도덕적인 부분(반체제 언론인 자말 까슈끄지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는 등) 에 대한 논란을 제쳐둘 수 있다면 국가를 이끌어가려는 비전 있는 지도자인 것 같긴 하다.

: 경제적인 이유에서 개혁이 필요한 부분도 있다. 자본을 유치하려면 개방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자국 인력 활용을 늘리려면 여성 노동력도 활용해야 하는데 운전을 못하게 하면 활용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젊은 인력을 활용하려면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일자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고.

사우디와 미국의 관계가 예전같지 않다. 미국이 셰일원유 생산 늘리면 사우디 경제에도 타격이 크지 않겠나.

: 사우디는 국가 안보를 위해 다른 나라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미국이 계속 필요할 것이다. 미국의 힘에서 쉽게 벗어나긴 어렵다. 사우디가 중국과 밀착하는 것도 미국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캐나다 맥길대에서 이슬람학 석사, 이란 테헤란대에서 이슬람학 박사학위를 받은 박 교수는 국내 손꼽히는 중동 정세, 이슬람 문화 전문가다. /이태경 기자

: 석유 생산에 관해 사우디와 미국이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미국은 석유 생산을 민간기업이 하기 때문에 수익성이 나빠지면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 사우디의 경우에는 국영기업이 담당하는 데다 관련 산업에 국가 재정을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유가가 내려가도 생산을 해야한다.

섣불리 덤비기엔 중동 시장의 눈높이는 여전히 높다. 국내 건설사의 저가 수주 관행도 문제다.

: 중동 사람들의 눈높이는 여전히 유럽이나 미국에 맞춰져 있다. 경쟁력 있는 가격에 기술전수 해준다고 하니까 한국을 좋아하는 것이다. 일본은 해외 진출에 앞서 기업 간 어느정도 담합을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완전경쟁 각개전투로 뛰어드니 저가 수주를 피하기 어렵다. 중동에서는 공사가 끝나면 유럽 수준의 엄격한 감리를 하면서 계속 문제점을 들춰내는데 그에 수반되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우리도 일본처럼 EPC(설계·조달·시공) 비중을 줄이고 투자 위주로 가야 한다.

서방 제재로 접근이 어렵지만 이란도 매력적인 시장이다.

: 제재가 닿지 않는 부분도 많다. 관광과 학술교류, 출판 등 분야에서 협력이 가능한데 제대로 접근이 이뤄지지 않아 아쉽다. 제재국면이 언젠가 풀릴 수도 있는데 풀린 다음에 들어가면 다른 나라에게 뺏길 수밖에 없다. 물밑에서라도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심지어 앙숙인 사우디와 이란도 협상을 이어가고 있다. 언젠가 사우디와 이란 시장이 같이 풀릴수도 있는데 우리는 너무 이분법적으로 보는게 아닌가 걱정된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제재와 반정부 시위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이란은 중동에서 성장 잠재력이 큰 나라다. 인구가 8000만에 달해 내수가 받쳐준다. 다른 중동 국가와 달리 농업도 잘 된다. 카스피해 인근에서는 이모작이 가능하다. 중동에서 유일하게 자체적으로 자동차를 생산한다. 자동차 한 대에 2만여개의 부품이 들어가는 만큼 관련 산업과 서비스업 기반도 갖추고 있다.

중동 비즈니스 성공을 위한 조언 부탁한다.

박: 중동의 왕정국가에서 정상외교(頂上外交)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경쟁심을 유발하는 것도 좋은 전략이다. 특히 사우디와 UAE, 카타르 세 나라의 경우 그렇다. 한 나라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 우리가 연구해서 다른 나라에 역제안 하면 반응이 뜨거운 경우가 많다.

이: 중동 기업은 국영 일색이라 우리 민간 기업들이 상대하기엔 힘이 부치는 경우가 있다. 국가 간 회담이 계속 이어지면서 국내와 현지 매체에 다뤄지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먼저 나서서 적극적으로 제안을 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중동 국가의 정부 관계자들에게 “한국에서 뭘 받기 원하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경우 “뭐든 좋다”고 답한다. 먼저 현지 상황에 맞는 제안을 하고, 그쪽에서 받아들이면 일이 수월하게 진행된다.

주의할 점이 있다면.

: 현지인과 친해지면 정치를 비판하거나 중동의 왕정 시스템을 다른 정치 제도와 비교해 언급하는 경우가 있는데, 절대 금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