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현지 시각)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하며 74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한 찰스 3세가 국왕으로서의 행보를 본격화한 가운데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찰스 3세가 보다 투명하고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이미지를 내세워 영국 현지뿐만 아니라 영 연방 곳곳에서 제기되는 왕실폐지 여론 진정에 나설 것으로 관측했다.

12일(현지시각) WSJ는 찰스 3세가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 웨일스 등 영국 연방의 자치 지역을 차례로 방문해 추도 예배에 참석한 것을 보도하며 엘리자베스 2세 서거 이후 영국 왕실이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12일(현지 시각) 고(故)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관이 머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성 자일스 대성당에 찰스 3세 국왕이 도착하자 한 소년이 국기를 흔들고 있다. /AP 연합뉴스

WSJ는 “찰스 3세는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왕 즉위식을 전 세계에 생중계했다”며 “이는 왕실을 더욱 가시적이고 대중과 가까운 이미지로 만들기 위한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첫 TV 대국민 연설에서 찰스 3세는 “평생 헌신하겠다는 어머니의 약속을 오늘 여러분에게 되풀이하겠다”며 “충성심과 존중, 사랑으로 영국인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밝혔다.

WSJ는 왕실 관계자를 인용해 “찰스 3세가 세인트 제임스궁에서 열린 즉위식 연설을 방송하기로 한 결정은 영국 왕실을 더욱 투명하고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군주제로 보이게끔 만들기 위한 광범위한 계획의 일부”라고 분석했다.

또 영국 매체들은 찰스 3세가 정치적 견해를 적극적으로 표명하는 군주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텔레그래프는 “찰스 3세가 오랜 시간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싸워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고, 더 타임스는 “찰스 3세는 리즈 트러스 총리와 만나는 자리에서 국정 현안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힐 것”이라고 예상했다.

다만 대외적인 환경은 그리 우호적이지 못한 상황이다. 우선 다이애나 왕세자빈과 이혼 등으로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2세에 비해 국민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는 1981년 당시 스무 살이었던 다이애나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고 윌리엄과 해리, 두 왕자를 낳았지만 1996년 결국 이혼했다. 이 과정에서 찰스 3세가 전 연인이었던 커밀라와 결혼 후에도 불륜 관계를 유지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국민의 공분을 샀다.

영국인들은 불행한 사생활에도 사회봉사에 늘 앞장섰던 다이애나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다. 다이애나는 이혼 이듬해인 1997년 8월 파파라치를 따돌리려다 교통사고로 숨을 거뒀다. 추모 열기가 영국 전역을 뒤덮었고, 동시에 국민의 분노가 찰스 3세를 향했다. 찰스 3세는 2005년 현 왕비인 커밀라와 결혼했다.

설상가상으로 엘리자베스 2세 서거 직후 영국 현지뿐만 아니라 영 연방 곳곳에서 군주제 폐지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대표적인 영 연방 중 하나인 뉴질랜드, 호주 등에서도 정치권을 중심으로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 전환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군주제에서 탈피하려는 움직임은 자메이카, 바하마, 벨리즈 등 다른 카리브해 국가에서도 감지된다. 앤드루 홀니스 자메이카 총리는 3월 윌리엄 왕세자 부부가 자메이카를 방문했을 때 자메이카가 영국 왕실과 결별하고 공화정으로 독립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고 벨리즈의 한 장관도 “진정으로 독립하기 위한 다음 단계를 밟아야 할 때”라고 말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