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과 애플이 러시아 연방하원을 선출하는 총선에서 러시아 정부의 야당 탄압과 부정선거를 지원했다는 비판에 휩싸였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적인 알렉세이 나발니 측이 여당인 통합러시아당에 맞서기 위해 개발한 선거운동 애플리케이션(앱)을 구글 플레이스토어와 앱스토어에서 삭제하는 등 선거 공정성 훼손에 개입한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 측이 만든 선거운동 애플리케이션 스마트 보팅(Smart Voting). /AP 연합뉴스

21일(현지 시각) 러시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푸틴 대통령의 정치 기반인 통합러시아당이 지난 17~19일 치러진 국가두마(하원) 의원 총선거에서 전체 450석 가운데 총 324석을 차지했다고 밝혔다. 러시아 국가두마는 전체 의석의 절반인 225명을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로, 나머지 절반을 지역구 투표로 뽑는다. 여당은 비례대표에서 49.8%를, 지역구에서 절대다수인 199석을 얻었다.

나발니 지지 세력은 이번 선거에서 통합러시아당 후보를 보이콧하고 야당 후보를 추천하는 ‘스마트 보팅(smart voting)’ 앱을 적극 활용할 계획이었다. 수감 중인 나발니는 옥중 메시지를 통해 야당 후보 추천 목록을 담은 해당 앱을 내려받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 앱은 투표 첫 날 구글과 애플에서 삭제됐다. 이들 빅테크 업체들은 현재까지 이와 관련한 언론의 입장 발표 요청에 응하지 않고 있다.

AP통신에 따르면 구글은 자사 문서도구인 구글 독스에서 스마트 보팅이 추천한 후보 관련 두 건의 문서를 열람할 수 없도록 했다. 유튜브도 야당 후보에 대한 동영상 콘테츠를 아예 차단했다. 익명을 요청한 구글 관계자는 AP에 러시아 규제당국이 해당 앱에 대한 접근을 막지 않을 경우 직원 개개인에 대한 형사처벌을 내리겠다며 위협했다고 말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P 연합뉴스

또다른 관계자는 “구글이 푸틴의 ‘권력 놀이’에 굴복했다”며 “직원들 사이에서 사측이 러시아의 압박에 굴복해 스마트 보팅 앱을 제거한 것을 조롱하는 목소리가 나왔다”고도 했다. 애플의 경우 자사 웹사이트에 ‘인권에 대한 약속’을 제시했지만, 한 국가의 법적 명령과 인권이 상충할 경우 상위 기준인 국법을 따른다는 내용을 명시하고 있다. 애플은 이번 사태에 대해선 어떠한 입장문도 내지 않았다.

국제 인권단체인 프리덤하우스는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러시아가 글로벌 기술업체들을 상대로 자국에서 따라야 하는 규제를 추가했다고 밝혔다. 또 빅테크는 통상 각국에서 정상적인 운영을 담보받기 위해 인권 등 공통의 가치를 무시하는 국법도 준수할 것을 이미 동의했다고 지적했다. 야권 인사 레오니드 볼코프도 성명을 내고 “거대 기술회사가 푸틴 대통령의 협박에 굴복했다”고 말했다.

디지털 자유 관련 비영리단체인 어세스 나우(Access Now)의 나탈리아 크라피바 기술고문은 “다른 독재자들이 러시아의 전례를 모방할 것”이라며 “전세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나쁜 소식”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애플과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등 주요 IT 업체들은 지난 10년 간 더욱 강력해졌다”며 “정부는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빅테크의 힘을 이용하려는 야망을 갖고 있으며, 러시아 사태는 정치적 억압의 전형”이라고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적이자 현재 수감 중인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 /로이터 연합뉴스

이번 선거에서 러시아 정부는 나발니를 중심으로 구성된 반부패재단을 극단주의 단체로 지정하고, 나발니 측근을 포함한 야권 인사 수십 명의 후보 등록 자체를 거부했다. 출마가 허용된 야권 인사들도 철저한 검증을 받아야 했다. 또 코로나19 대유행을 이유로 기존 하루동안 치렀던 투표를 사흘에 걸쳐 확대해 공정성을 훼손했다는 지적도 피할 수 없게 됐다.

AP는 푸틴 대통령이 이번 선거로 오는 2024년 대선에서 안정적인 권력을 유지하는 데 다양한 선택지를 갖게 됐다고 보도했다. 특히 푸틴 대통령이 향후 권력 유지 시나리오에 필수적인 ‘크렘린이 통제하는 의회’를 손에 넣었다고도 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공산당 후보로 모스크바에 출마했던 발레리 라슈킨은 “수치스럽고 완전한 범죄”라며 선거 결과 불복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제1야당인 공산당은 18.9%를 득표해 비례대표와 지역구를 합쳐 총 57석을 확보했다. 5년 전보다 15석이 늘었지만 통합러시아당의 독주를 막지는 못했다. 극우 성향의 자유민주당과 사회민주주의 계열 정의러시아당이 각각 7.6%를 득표했다. 중도우파인 ‘새로운사람들’은 5.4%를 얻어 의석 배정을 위한 최저 득표율인 5%를 넘었다. 투표율은 51%로 잠정 집계됐다. 러시아 선관위는 오는 24일 최종 개표 결과를 공식 발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