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일 북핵 수석대표들이 일본에서 모이는 14일 왕이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미·중 간 패권 경쟁이 심화하는 가운데 한국이 미국과 가까워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행보로 풀이된다.

중국은 그간 한·미·일이 협력을 강화할 때마다 한국에 영향력을 과시해왔다. 지난 4월 한·미·일 안보실장 회의가 열리던 기간에는 정의용 외교부 장관을 푸젠성 샤먼으로 초청해 외교장관 회담을 했고, 지난 6월에는 한·미·일 정상이 모두 모이는 G7 정상회의를 앞두고 “(한국은) 남의 장단에 기울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한국과 미국이 전례 없이 밀착하는 시점에서 이뤄지는 이번 방한은 이전보다 공격적인 면모를 띌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국은 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 처음으로 대만 문제를 언급했고, 미국 의회는 이달 초 미국·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5국 정보 공동체인 ‘파이브 아이즈(Five Eyes)’에 한국을 포함시키는 구상을 내놓은 상태다.

왕 부장은 실제 아시아 4개국 순방 첫 기착지인 베트남에서부터 “역외 세력의 간여·도발·모독·공격”이란 강도 높은 표현을 쓰며 마지막 행선지인 한국을 압박했다. 그는 10일 팜 빈 민 베트남 부총리와 함께 하노이에서 개최한 중국·베트남 양자 협력 지도위원회 회의에서 “역외 세력의 간여와 도발을 공동으로 경계하고 저지해야 한다”고 촉구했고, 11일 팜 민 찐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는 “외부 세력의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모독과 공격을 손잡고 저지하자”고 했다.

왕이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2021년 9월 10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를 방문해 팜 빈 민 베트남 부총리와 만나고 있다. 왕 부장은 이후 캄보디아, 싱가포르, 한국을 차례로 방문할 예정이다. /연합뉴스

왕 부장은 아시아 국가들과 반중(反中) 전선을 짜겠다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도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11일 부이 타잉 썬 베트남 외교장관과 진행한 회담에서 “역외 세력이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의 지위를 무력화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중국은 아시아태평양 및 동아시아에 집중하고, 아세안 중심의 지역 협력 구조를 확고히 추진하길 원한다”고 했다.

미·중 핵심 갈등 사안인 남중국해 문제와 관련해서는 “양국 관계의 ‘적당한 위치’에 둬 정세를 복잡하게 만들거나 분쟁을 확대하는 일방적 행동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며 베트남에 미국과의 거리두기를 요구했다. 왕 부장은 12일 훈 센 캄보디아 총리와 만나서도 “중국과 아세안 국가들이 내년에 ‘남중국해 행동 강령’ 협상을 완료하고, 유엔해양법협약(UNCLOS)을 비롯한 국제법을 준수하는 표준을 제정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왕 부장의 이러한 발언에는 ‘항행의 자유’ 작전 등을 비롯한 미국의 모든 역내 개입을 차단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정 장관은 앞서 8일 쁘락 소콘 캄보디아 부총리 겸 외교장관과 제11차 한-메콩 외교장관회의를 공동 주재하며 “남중국해에서 UNCLOS를 포함한 국제법이 존중되고 항행 및 상공비행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어, 왕 부장이 15일 한·중 외교장관 회담에서 이를 거론할 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12월 14일 베이징 인민대회당 동대청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확대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왕 부장이 이번 방한에서 최근 견고해진 북·중 밀착 국면을 지렛대로 삼아 한국의 중립을 요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임기 말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재가동을 위해 외교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문재인 정부로써는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는 데에 중국의 도움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왕 부장이 내년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문 대통령의 방중을 요청할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가장 극적인 시나리오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주선으로 남북 정상이 베이징에서 만나는 것이다. 대선을 한 달 남겨둔 시점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중국이 원하는 ‘전략적 모호성’을 좀 더 오래 유지하는 안을 고려할 수 있다.

다만 어떤 상황에서도 미국이 가만히 있을 가능성은 낮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지난 1월 출범 이후 한·미·일 3자 협의를 거듭 개최하며 중국에 대한 직접적인 견제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14일 한·미·일 북핵 수석대표 협의를 포함하면, 한·미 북핵수석대표인 노규덕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성 김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는 최근 한 달 사이에만 세 차례에 걸쳐 대면 협의를 갖게 된다.

바이든 대통령 본인도 대중(對中) 강경 기조를 계속해서 재확인하고 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철군 직후 “중국과 심각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며 종전 결정을 정당화한 데 이어 11일 9·11 테러 20주년을 맞아 펜실베이니아 생크스빌을 방문한 자리에서도 시 주석을 겨냥해 “21세기에도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진심으로 믿는 독재자들이 많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