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총통 선거에서 집권 민주진보당(민진당)의 라이칭더 후보가 당선되면서 대만의 경제 정책은 큰 변화 없이 기존 차이잉원 정부의 노선을 이어가게 됐다. 특히 라이칭더는 반도체 산업에 대한 투자 확대 기조를 유지해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확대하겠다는 입장인데, 메모리 반도체를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 대만을 추격하고 있는 한국 반도체 업계가 긴장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기에 신남방 지역 중심의 무역 활로 확대, 신재생에너지 확대 정책 역시 한국이 눈여겨볼 부분이다.

라이칭더는 지난 13일 오후 8시 30분(현지 시각) 타이베이시 베이핑둥루에 있는 전국경선총본부에서 국제기자회견을 열고 “반도체 산업을 더욱 발전시킬 것”이라며 “세계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완전한 산업 공급망을 형성하기 위해 재료 및 장비 연구·개발(R&D), 집적회로(IC) 설계·제조·패키징 및 테스트 분야에서 반도체 산업을 적극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라이칭더는 반도체·인공지능(AI)·군수·보안·통신 등을 ‘5대 신뢰 산업’으로 지정하고 육성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은 바 있다.

지난 13일 총통 당선 확정 직후 대만 타이베이시 베이핑둥루에 있는 전국경선총본부에서 국제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라이칭더./AP연합뉴스

반도체 산업 강화는 차이 총통의 정책을 승계한 것이다. 앞서 대만 행정원은 지난해 11월 ‘반도체 칩 주도의 대만 산업 혁신 방안’을 통과시켰다. 반도체 산업 혁신·인재 양성·기술 개발 가속화·해외 투자 유지 등의 전략이 담겼다. 특히 대만 IC 설계의 세계 점유율을 현재 20%대에서 40%대로 끌어올리고, 첨단 제조공정 점유율도 80%까지 높이기로 했다. 이를 위해 대만 정부는 향후 10년간 3000억대만달러(약 12조7000억원)를 투입한다. 구체적 실행 계획은 라이칭더가 공식 취임하는 5월 20일 이후 나올 것으로 전망된다.

대만의 이같은 전략은 한국 반도체 업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김준규 코트라 타이베이 무역관장은 “한국이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는 대만을 앞서고 있지만, 파운드리(위탁생산) 등 다른 분야에서는 대만 TSMC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며 “대만은 이미 잘하는 파운드리는 물론, 팹리스(설계 전문)까지 키운다는 건데, 계획이 현실화할 경우 한국과 대만의 기술력 차이는 더욱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대만 반도체 기업 TSMC./로이터 연합뉴스

◇ 양자 간 협정 위주로 무역 활로 뚫을 듯… 아세안 무대서 韓과 경쟁 가능성

통상 부문에서는 양자 및 다자 간 무역협정 체결을 지속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대만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관세 철폐와 경제 통합을 목표로 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 신청서를 제출한 상황이다. 라이칭더 역시 CPTPP 가입 의사를 지속해서 밝히겠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이다. 회원국의 만장일치 찬성을 얻어야 합류할 수 있는데, 함께 신청서를 제출한 중국이 대만 가입을 반대하면서 회원국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양자 간 무역협정은 보다 수월한 편이다. 이미 지난해 6월 대만은 미국과 ‘21세기 무역에 관한 이니셔티브’ 1차 협정을 체결했다. 이 합의는 관세 면제 등과 같은 문제를 다루지 않아 정식 자유무역협정(FTA)은 아니지만, 미국과 대만 간 관세 규제 개선, 물류 시간 단축 등 무역 관계 강화 정책을 담고 있다. 이 외에 영국과도 지난해 11월 신재생에너지·디지털 무역·투자 등에 초점을 맞춘 ‘강화된 무역 파트너십(ETP)’ 협정을 체결했다. 국가 대 국가로 체결해야 하는 FTA 대신 미국·영국 등과 맺은 협정 형태로 통상 우호국을 늘려갈 것으로 보인다.

라이칭더가 ‘신남향 정책’을 심화해 나가겠다는 공약을 내건 것은 한국 입장에서 주목할 만하다. 신남향정책이란 대만이 싱가포르와 베트남 등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10개국, 남아시아 6개국과 호주, 뉴질랜드 등 18개 국가들과 긴밀한 경제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 역시 ‘한·아세안 정상회의’ 등 각종 국제 무대에서 아세안과의 협력을 강화하겠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강조해 왔다.

◇ 탈원전 지속… 신재생에너지 확대는 韓에 기회

SK오션플랜트가 제작한 해상풍력 발전기 하부구조물 '재킷'이 대만 서부 팡위안 해안 인근에 설치돼 있다./SK오션플랜트 제공

에너지 부문 정책도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관측된다. 먼저 차이 총통의 ‘탈원전’ 기조를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 차이 총통은 2016년 취임 초부터 2025년까지 대만 내 원자로 6기를 모두 폐쇄한다는 일명 ‘비핵가원(非核家園)’ 정책을 추진해 왔다. 탈원전 여파로 대규모 정전이 발생하고 국영 전력 기업이 파산 위기에 놓였지만 차이 총통은 원전 폐기를 강행했다. 대만 내 탈원전에 대한 비판이 여전히 거센 만큼 윤석열 정부 들어 한국 기업들이 대만 원전 시장 진출 기회를 엿봤지만, 현실적으로 탈원전 정책 폐기는 어려운 분위기다.

다만 신재생에너지 정책 강화 방향은 한국 기업에 기회가 될 수 있다. 라이칭더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중을 현 20%에서 30%까지 늘리고, 수소·지열·바이오·해양 에너지 등 다양한 녹색 에너지를 개발하겠다고 밝혔다. 이 중에서 해상 풍력의 경우 LS전선이 해저케이블을, SK오션플랜트가 재킷(해상풍력 발전기를 해저에 지탱시키는 하부구조물의 일종)을 수주하는 등 대만 내 신뢰도를 쌓아가고 있어 추가 수혜를 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