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환경·지속가능 트렌드와 관련해 거대한 시장이 열려있다. 한국 기업들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서비스와 상품 혁신에 소극적으로 임하면 앞으로 글로벌 시장 경쟁에서 밀릴 수 있다.”

지난달 20일, 싱가포르의 그랜드 콥튼 워터프론트 호텔에는 도합 수천조원을 주무르는 글로벌 금융 기업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들이 집결했다. ‘탈(脫)탄소 가속하는 아시아(Catalysing Decarbonisation in Asia)’ 주제 아래 열린 컨퍼런스 참석을 위해서다.

벤자민 맥캐론 ARE 창업자 겸 사무총장. /이용성 기자

당시 행사에는 보유 자산 규모가 우리 돈 약 720조원에 이르는 싱가포르 최대 은행 DBS와 870조원을 운용하는 피델리티 인터내셔널, 각각 630조원, 260조원을 굴리는 영국계 자산운용사 에버딘과 일본 니코 자산관리 등이 참여해 지속가능성 제고를 위한 전략과 성과를 공유했다.

이들을 움직인 건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전문 사회적기업 ARE(Asia Research and Engagement)의 설립자 겸 사무총장 벤자민 맥캐런(Benjamin McCarron)이다. 영국에서 태어나 옥스퍼드대에서 수학과 철학을 전공한 그는 대학 졸업 후 펀드매니저로 일하다가 싱가포르로 건너와 2013년 ARE를 설립했다.

금융허브 싱가포르를 무대로 투자자와 기업들이 지속가능한 발전을 주제로 대화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게 ARE의 주된 역할이다. 수익에 민감한 기업과 투자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펀드매니저 시절과 옥스퍼드 재학 시절 쌓은 전문지식·네트워크가 큰 힘이 됐다.

10년 전만 해도 영국 등 유럽과 비교하면 ESG의 불모지나 다름 없던 싱가포르가 세계적인 녹색금융 중심지로 우뚝서게된 데는 그의 이 같은 노력이 단단히 한몫 했다. 창업 10주년을 맞은 ARE의 맥캐런 사무총장을 컨퍼런스가 열린 싱가포르 그랜드 콥튼 워터프론트 호텔에서 인터뷰했다.

수백조원 씩 굴리는 투자사들을 이런 자리에 불러모을 수 있었던 비결이 뭔가.

“투자자들은 때로 함께 힘을 모아 기업에 대해 더 큰 목소리를 내고싶어 한다. 그런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게 우리 역할이다. 지난 10년 동안 ARE를 운영하면서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네트워크가 형성됐다. ARE는 에너지 전환(화석연료에서 친환경 에너지로) 관련 8개 기관투자자와 협력한다. 이들은 총 5조 달러(약 6300조원)를 움직인다.”

가브리엘 윌슨-오토(왼쪽)피델리티 인터내셔널 지속가능 투자 전략 부문장이 지난달 20일 싱가포르 그랜드 콥튼 워터프론트 호텔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은 맥캐런 사무총장. /이용성 기자

ARE의 수익 모델이 궁금하다.

“독지가들의 기부도 받고, 투자자의 도움도 받는다. 우리는 사회적 기업이다. 기업의 변화를 촉진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뜻을 같이하는 이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기업의 ESG 전략 등을 조언하는 컨설팅 서비스도 수익원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맥캐런은 CNBC와 블룸버그 TV 등 경제방송의 ESG 전략 관련 단골 초대손님이다).

“그렇게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기로 했다. 기업의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기업의 이해관계와는 거리를 두고 완전히 객관적이고 독립적으로 일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이 가능하겠지만 이해관계가 복잡해지면 본질을 해칠 수 있다.”

폭염과 폭우가 빈번해지는 등 전 세계적으로 기후변화 징후가 분명해졌다. ESG 관련 이슈를 대하는 기업들의 태도에도 변화가 느껴지나.

“기후변화도 그렇지만 코로나19 팬데믹(전염병의 세계적인 대유행)을 겪으면서 ‘환경 관련 문제를 더는 먼 미래의 문제로 치부하고 방치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인식이 확산한 것 같다. 싱가포르를 비롯한 아시아에서는 특히 그랬다. 그 결과 주요 기업의 ESG 관련 조직 규모도 커졌고, 접근 방식도 개선됐다. 조직은 커졌지만, 관련 업무를 이끌 전문 인력이 부족한 건 문제다.”

앞으로는 ESG 관련 이슈 대응을 잘 하는 기업이 돈도 잘 벌게 될까.

“이제 많은 사람들이 ESG 정보가 더 나은 투자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어떤 기업의 ESG 관련 정보를 잘 알고 있다면 그 기업의 가치를 더 잘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조건 모든 조건이 동일한데 한 기업은 건강이나 안전 관련 부정적인 이슈가 없고, 다른 쪽은 있다면 당연히 없는 쪽에 투자하지 않겠나.”

전 세계 지속가능성 투자자산 현황. /조선DB

한국 기업들의 ESG 활동은 어떻게 보나. 조언도 부탁한다.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과 소프트파워를 생각하면 관련 분야의 기업 활동이 다소 미진한 것 같다. 전 세계 기업들이 ESG 상품과 서비스 혁신에 공을 들이고 있다. “친환경(중점)지속가능 트렌드와 관련해 거대한 시장이 열렸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들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서비스와 상품 혁신에 소극적으로 임하면 앞으로 글로벌 시장 경쟁에서 밀릴 수 있다. 한국의 은행 관계자와 만난 적이 있다. 아시아에서는 싱가포르의 은행들이 가장 구체적인 산업 분야별 탈(탈)탄소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은행들도 보다 구체적인 세부 계획을 세웠으면 좋겠다. ‘30년 뒤에 계획보다 5~10년 후의 계획이 있어야 고객과 투자자들도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런던에서 펀드매니저로 일하다가 어떻게 지속가능성 이슈에 관심을 갖게 됐나.

“지금은 바클레이즈(영국계 투자은행)의 일부가 된 투자사에서 1997년 펀드매니저 생활을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앨런 그린스펀 당시 연준(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 Fed) 의장이 주식시장의 거품을 걱정하며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거기서 약 6년을 일하고 나서 재충전을 위해 여행을 떠났다. 고고학에 관심이 많아 그리스와 터키 등 유럽에 있는 고대 유적지를 돌아다녔고, 이어 튀르키예(터키), 이란, 파키스탄, 인디아 등을 둘러봤다. 한 때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유적지를 보면서 지속가능한 것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문명의 흥망성쇠는 환경을 비롯한 지속가능성 이슈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비이성적 과열’은 그린스펀이 연준 의장 시절인 1996년 12월 미국기업연구소 연례만찬 모임에서 처음 사용했다. 이성을 잃고 주가가 계속 오를 것이란 기대감에 너도나도 증권시장에 몰려드는 현상을 우려하며 사용한 표현이다. 1990년대 미국 호황이 식을 줄 모르고 절정을 향하던 1996년 미국주식시장에는 거품이 생겼고 사람들은 치솟는 주가를 보고 무작정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다.

하라파와 함께 인더스 문명을 대표하는 두 도시 중 하나인 모헨조다로의 유적지. 기원전 2,600년경 건설된 모헨조다로는 오늘날 파키스탄의 ‘신드 라르카나’에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결정적인 계기가 된 순간이 여행 중에 있었는지.

“여행 중 어느 한 순간에 ‘번쩍’ 하고 눈이 떠진 건 아니다. 여러 번 그런 순간들이 찾아왔다. 파키스탄에서 시간이 아마 중요했을 것이다. 관광객과 연인들이 많이 찾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고 해서 놀러갔는데, 호수가 말라가고 있었다. 호수가 말라가면서 주위 인심도 삭막하게 변했다는 걸 느꼈다. 파키스탄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또 있었다. 파키스탄은 수천년 전 인더스 문명이 융성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더스 문명은 지속 가능하지 않았던 것의 예이기도 하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인구가 급증했고, 그 여파로 물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식량을 충분히 생산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인더스 문명이 몰락한 이유를 설명하는 여러 이론 중 하나일 뿐이지만.”

펀드매니저 일이 그만두면서 수입이 많이 줄었을텐데, 집안이 넉넉했나.

“중산층 출신이라고 해두자. 외조부모님은 페르시아(이란)에서 영국으로 건너온 이민 1세대였고, 카페트 등을 수입해 팔았다. 유복한 것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부모님은 자식들이 부유해야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다. 자녀들이 모두 스스로 결정하고 각자의 기준에서 성공하길 원했다. 물론 행동과 결정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도 강조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