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지오가 2023년 토끼띠를 맞아 출시한 조니워커 블루 라벨 특별판. 중국 패션 디자이너 에인절 천이 디자인했다. /조니워커

중국 불교계에서 4대 명산(名山)으로 꼽히는 남서부 쓰촨성 러산시 어메이산시의 어메이산(峨眉山). 거대 불상인 러산 대불이 있는 이 산의 동남쪽 산기슭에 프랑스 주류 회사 페르노리카(Pernod Ricard)의 중국 첫 몰트 위스키 증류소가 있다. 2019년 8월 착공해 2021년 8월부터 위스키 생산을 시작한 ‘뎨촨 몰트 위스키 디스틸러리(叠川 THE CHUAN Malt Whisky Distillery)’다. 페르노리카가 중국에서 스코틀랜드산(스카치) 수입 위스키를 팔기 시작한 지 30여 년 만에 직접 ‘메이드 인 차이나’ 몰트 위스키 주조에 뛰어든 것이다.

페르노리카는 매출액(2022 회계연도 107억 유로, 약 14조8400억 원) 기준 세계 2위 와인·증류주 제조사다. 보유 브랜드가 240여 개에 달한다. 그중 위스키로는 스카치 위스키 발렌타인·시바스 리갈·글렌리벳·로얄 살루트·임페리얼, 아이리시 위스키 제임슨·미들턴·싱글 브레스트 등이 있다. 페르노리카 전체 매출에서 중국이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 외국 술 제조사가 중국 땅에 몰트 위스키 증류소를 직접 짓고 제조에 나선 것은 페르노리카가 처음이다.

프랑스 주류 기업 페르노리카가 중국 남서부 쓰촨성 러산시 어메이산(峨眉山)에 지은 중국 첫 몰트 위스키 증류소 ‘뎨촨 몰트 위스키 디스틸러리(叠川 THE CHUAN Malt Whisky Distillery)’. /페르노리카

첩첩산중(叠) 강줄기(川)를 낀 곳에 자리잡아 증류소에 뎨촨(叠川)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중국산 최고급 위스키를 만들겠다는 취지에 맞게 처음으로 중국인을 마스터 디스틸러(증류주 생산자)로 임명했다. 유럽과 중국에서 수확한 보리를 쓴다. 어메이산의 기후는 여름에도 서늘한 스코틀랜드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습하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에서와는 다른 숙성 방식을 쓴다고 한다. 이미 지난해 초 위스키 수집가 등 소수 고객에게 중국산 싱글 몰트 위스키가 담긴 캐스크(오크통) 100통이 사전 판매됐다. 중국 일반 소비자에겐 빨라도 올해 말이나 내년에야 판매가 가능하다고 한다. 중국에선 증류된 원액을 오크통(참나무통)에서 2년만 숙성해도 위스키로 판매할 수 있지만, 페르노리카는 최소 3년 숙성이 원칙인 스카치 위스키 제조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2019년부터 향후 10년간 이 증류소에 투자하겠다고 밝힌 금액만 건설비를 포함해 10억 위안(약 1900억 원)에 달한다. 필립 게타트 페르노리카 아시아 최고경영자(CEO)는 “특히 중국 중상류층에서 새로운 맛, 새로운 트렌드를 접하려는 열망이 크다”며 “중국 특색 몰트 위스키를 탄생시킬 것”이라고 했다.

프랑스 주류 기업 페르노리카가 중국 쓰촨성 어메이산에 지은 중국 첫 몰트 위스키 증류소 ‘뎨촨 몰트 위스키 디스틸러리(叠川 THE CHUAN Malt Whisky Distillery)’. /페르노리카

◇ 중국 2030, 싱글 몰트에 빠지다…스코틀랜드·일본산 싹쓸이

중국이 위스키 맛을 알아버렸다. 위스키를 마시는 중국인이 많아지면서 중국뿐 아니라 세계 주류 소비 시장에 지각 변동이 일고 있다. 중국의 위스키 수입 증가로 전 세계 위스키 가격이 오르는가 하면, 세계 1·2위 주류 회사들이 아예 중국에서 위스키를 만들겠다고 나섰다. 이젠 위스키도 중국산 세상이다.

지금도 중국에서 가장 많이 마시는 술은 투명하고 독한 증류주, 백주(白酒 바이주)다. 중화인민공화국(신중국)을 건국한 마오쩌둥이 즐겨 마신 고급 백주 구이저우마오타이(貴州茅台 귀주모태 Kweichow Moutai)는 중국인 사이에 최고의 선물로 꼽힌다. 중국인이 마시는 증류주 대부분이 백주다. 중국 브랜드 컨설팅 기업 리쓰잔(RIES)이 2020년 8월 낸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중국 증류주 시장에서 백주 점유율이 96%였다.

중국 베이징의 미국계 유료 회원제 마트 샘스클럽에서 판매 중인 싱글 몰트 위스키 제품. /베이징=김남희 특파원

그러나 백주가 점령한 증류주 시장에서 위스키가 조금씩 세력을 넓히고 있다. 위스키는 처음엔 중국 부유층 사이에서 부와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값비싼 외국 술이란 성격이 강했다. 영국 위스키 전문 투자사 스틸노비스티는 2020년 1월 중국 내 스카치 위스키 시장 분석 글에서 “사회적 지위를 중시하는 중국 문화에서 위스키는 품격과 부를 상징하는 세련된 술이란 이미지가 있다”며 “비싼 가격도 브랜드와 품질을 따지는 중국 소비자에게 통하는 요소”라고 했다.

요즘은 대도시에 사는 젊은 중산층에서 특히 위스키 수요와 소비가 늘고 있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위스키를 그 자체로 음미하는 문화가 생겨났다. 젊은 층은 예전 세대만큼 백주를 흥청망청 마시지 않는다. 많이 마시는 것보단 비싸더라도 품질 좋고 맛 좋은 술 한 잔을 선호한다. 2030 세대에선 혼술(혼자 마시는 술)에도, 홈술(집에서 마시는 술)에도, 소셜미디어 인증샷에도 위스키가 제격인 것이다.

중국 베이징 다왕루 지역 음식점 코뮨 리저브에서 판매 중인 일본산 위스키. 일본 산토리의 야마자키 싱글 몰트 12년산 싱글은 한 잔에 198위안(약 3만7000원), 병은 3980위안(약 75만 원), 하쿠슈 싱글 몰트 12년산 싱글은 한 잔에 188위안(약 3만6000원), 병은 3500위안(약 67만 원)에 판매 중이다. /베이징=김남희 특파원

중국의 위스키 수입액은 최근 몇 년간 큰 폭으로 늘었다. 중국식품토축수출입상회(CCCFNA) 집계에 따르면, 2021년 중국의 위스키 수입액은 4억6000만 달러(약 6000억 원)로, 1년 전 대비 거의 두 배 증가했다. 스코틀랜드 위스키 산업 단체인 스카치위스키협회(SWA) 발표에 따르면, 중국은 2021년 금액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스카치 위스키 수출 시장이었다. 2021년 중국의 스카치 위스키 수입액은 1억9800만 파운드(약 3156억 원)로, 2020년 대비로는 85%, 2019년 대비로는 123% 증가했다. 양으로 보면 중국은 스카치 위스키 수출 톱 10에 들지 않는다. 수입하는 양에 비해 금액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중국에서 고가의 하이엔드 위스키 수요가 많다는 뜻이다.

중국 소비자 사이에선 블렌디드 위스키보다는 싱글 몰트 위스키 선호도가 훨씬 높다. 한 곳의 증류소에서 몰트(맥아·보리를 발아시켜 말린 것)만으로 만든 게 싱글 몰트고, 여러 증류소의 몰트와 옥수수·밀 등을 넣은 그레인 위스키를 섞어 만든 게 블렌디드 위스키다. 보통 스카치 위스키 생산량의 90%가 블렌디드 위스키다. 싱글 몰트는 생산량이 적고 따라서 가격이 더 비싸다. 중국 소비자는 싱글 몰트를 더 프리미엄 위스키라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중국에선 2017년 수입 스카치 위스키 중 33%가 싱글 몰트였다. 2020년 싱글 몰트가 블렌디드 위스키 비중을 앞지르더니, 2021년엔 싱글 몰트 비중이 60% 이상으로 높아졌다.

중국 베이징의 한 마트에 진열된 싱글 몰트 위스키 제품. /베이징=김남희 특파원

베이징·상하이·광저우·선전 등 중국 대도시에선 위스키 바가 대유행이다. 탐험하듯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세계 각지 증류소의 다양한 위스키를 탐색하는 게 트렌드다. 베이징 상업 중심지인 궈마오 지역 파크 하얏트 호텔 65층 차이나 바에선 최근 싱글 몰트 위스키 세트를 새로 내놨다. 글렌리벳 15년산 싱글 몰트 스카치 위스키 2병과 감자튀김, 닭고기 요리(라쯔지), 과일로 구성된 세트의 가격은 4462위안(약 85만 원). 이곳 바텐더는 “2~3년 전부터 혼자든 여럿이든 위스키를 주문하는 젊은 손님이 부쩍 많아졌다”며 “블렌디드보다는 싱글 몰트를 더 많이 찾고, 이것저것 마셔보며 각 위스키의 맛과 향, 스토리를 공부하듯 익히는 손님도 있다”고 했다.

인근 다왕루 지역의 식당 겸 바인 코뮨 리저브에서도 술 매출 중 위스키 매출이 늘고 있다. 주변 금융·투자 회사 등에 다니는 20~40대 젊은 직장인이 주 고객층이다. 근처엔 세계 백화점 매출 1위인 SKP백화점이 있어 베이징 ‘젊은 부자’들도 많이 방문한다. 저녁 시간에 가면 서너 명이 맥캘란이나 발베니 싱글 몰트 위스키를 병째 시켜 놓고 피자나 버거와 함께 먹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중국 베이징의 한 마트에서 영국 토마틴 증류소의 '1977 웨어하우스 6 컬렉션' 하이랜드 싱글 몰트 스카치 위스키가 6만1500위안(약 1170만 원)에 판매되고 있다. /베이징=김남희 특파원

◇ 세계 1·2위 주류 회사 모두 ‘차이나 오리진’ 위스키 생산 뛰어들어

중국은 위스키 소비뿐 아니라 생산에서도 ‘빅 플레이어’가 될 채비를 하고 있다. 페르노리카·디아지오 같은 외국 주류 대기업은 물론, 중국 사업가나 스타트업도 중국산 싱글 몰트 만들기에 도전하는 것이다. 현재 중국 남서부 윈난성과 쓰촨성, 동남부 푸젠성 등에서 약 20개 위스키 증류소가 건설 중이거나 운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산 위스키 생산이 아직 완전 초기 단계이긴 하지만, 거대한 내수 시장을 기반으로 생산 규모가 커지면 언젠가 위스키 수출국이 될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스코틀랜드에서 증류 기술과 노하우를 배워온 일본이 그랬듯 말이다.

영국 주류 기업 디아지오도 중국 남서부 윈난성 다리 (大理) 백족 자치주 얼위안(洱源)현에 중국 내 첫 몰트 위스키 증류소를 짓고 있다. 해발 고도 2100m, 6만6000㎡ 면적에 자리 잡았다.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산악 지대 호수인 얼하이(洱海)의 수원지 광천수로 위스키를 만든다고 한다. 디아지오는 2021년 11월 착공식을 열며 “온화한 기후와 다채로운 생물 다양성, 얼하이 접근도를 고려해 증류소 입지를 선정했다”며 “‘디아지오 얼위안 몰트 위스키 디스틸러리’에서 중국 프리미엄 위스키 애호가를 위한 디아지오의 첫 ‘차이나 오리진’ 싱글 몰트 위스키를 만들 것”이라고 했다. 초기 투자금 7500만 달러(약 988억 원)를 투입했다. 올해 말쯤 위스키 원액을 오크통에 넣고 숙성을 시작하면 2026년 디아지오의 첫 중국산 싱글 몰트 위스키를 맛볼 수 있게 된다.

영국 디아지오가 중국 남서부 윈난성 얼위안현에 짓고 있는 중국 내 첫 몰트 위스키 증류소 '디아지오 얼위안 몰트 위스키 디스틸러리’. /디아지오

디아지오는 조니워커·뷰캐넌스·싱글턴·탈리스커 등 100여 개 스카치 위스키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중국에선 철저히 고급화 전략을 쓰고 있다. 조니워커·싱글턴 등 ‘수퍼 프리미엄·럭셔리 스카치’ 포트폴리오 위주로 중국 중산층 이상 소비자층을 공략 중이다.

중국 시장 대표 주자는 블렌디드 스카치 위스키인 조니워커(Johnnie Walker)다. 디아지오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대중화구(중국 본토·대만·홍콩·마카오)에서 판매량이 가장 많은 스카치 브랜드가 조니워커였다. 특히 조니워커의 라인업 중 최상급인 조니워커 블루 라벨의 인기가 높다. 조니워커는 매년 새해 열두 띠 동물 한정판을 내놓는데, 예약 판매 개시와 동시에 매진되곤 한다. 2023년 토끼띠 조니워커 블루 라벨 특별판 술병과 패키지엔 중국 패션 디자이너 에인절 천(Angel Chen)이 중국 전통 서예 방식으로 그린 토끼 그림을 넣었다. 중국 알리바바그룹 산하 온·오프라인 마트 허마셴성에선 조니워커 블루 라벨 토끼띠 특별판 750㎖ 제품을1619위안(약 30만 원)에 판매했는데, 입고 즉시 완판됐다. 2021년엔 제품에 중국의 상징인 자금성(고궁박물원)을 그려 넣은 조니워커 블루 라벨 포비든 시티 에디션을 출시하기도 했다. 중국 문화와 전통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으면서 고급스럽고 특색 있는 제품을 갈구하는 중국 소비자를 파고들었다. 싱글턴(The Singleton)은 2020년 기준 대중화구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싱글 몰트 위스키 브랜드였다.

중국 자금성(고궁박물원) 그림이 그려진 조니워커 블루 라벨 한정판. /조니워커

디아지오 그룹 전체 매출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만 놓고 보면 중국은 인도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시장이다. 2022 회계연도(2021년 7월~2022년 6월)에 중국 매출 비중이 5%를 넘어섰다. 디아지오는 중국 쓰촨성의 고급 백주(바이주) 브랜드 수이징팡(水井坊 수정방)도 보유(지분율 63.14%)하고 있다. 2023 회계연도 상반기(2022년 7~12월)엔 대중화구 전체 매출이 2022 회계연도 상반기 대비 2% 늘어난 데 그친 반면, 주종별로 보면 스카치 위스키 매출은 20% 증가했다. 특히 고가 제품군인 수퍼 프리미엄 플러스 부문에서 중국 본토 실적이 강했다고 디아지오는 밝혔다. 디아지오가 투자를 늘리고 있는 이커머스(전자 상거래) 채널에서 성과가 났다. 2021년 중국 알리바바그룹 산하 온라인 쇼핑몰 티몰(톈마오)에서 디아지오는 위스키 시장 점유율 24%로 1위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