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가로 인한 인플레이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집권 후 처음으로 사우디를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원하던 원유 증산 약속을 얻어내지 못했다고 로이터 통신과 CNN, 이스라엘 영문매체 예루살렘포스트 등 주요 외신이 17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15일(현지 시각) 사우디 아라비아를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홍해 연안 제다의 알 살람 궁에서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와 회담하고 있다.

지난 13일부터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를 잇따라 방문한 바이든 대통령은 16일 중동 순방을 마쳤다. 15일에는 사우디의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를 납치·피살한 배후자로 지목됐던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를 만나 ‘주먹 인사’를 나누고 전략적 파트너십 강화를 논의했다.

이어 바이든은 16일 제다에서 열린 걸프협력이사회(GCC)에 참석해 “국제적인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충분한 공급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는 데 우리는 동의했다. 에너지 생산업체들은 이미 증산했으며 향후 수개월간 벌어질 일에 대해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 등 주요 산유국을 포함한 OPEC+의 8월 3일 회의 때 원유 증산 결정을 해줄 것을 기대하는 발언이었지만 사우디는 냉담했다. 빈 살만 왕세자는 “사우디는 이미 최대 생산 능력치인 하루 1300만 배럴까지 증산 계획을 발표했으며 이를 넘어서는 추가 생산은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요구를 일축했다. 사우디와 증산 여력이 있는 국가로 꼽혀 왔으나 미 대통령 앞에서 ‘불가’ 방침을 밝힌 것.

13∼16일 4일간의 중동 순방에서 다른 지도자와 만났을 때 스스럼없이 포옹했지만 이날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이유로 주먹 인사만 나눴다. 미 워싱턴포스트(WP)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던 카슈끄지가 2018년 피살됐을 때 무함마드 왕세자의 승인이 있었다는 이유로 순방 전부터 “잔혹한 독재자와 손잡았다”는 비판 여론이 거센 것을 의식한 행동으로 풀이된다.

카슈끄지 사건은 미국에서 왕실 비판 칼럼을 써오던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2018년 10월 결혼 관련 서류를 발급받으러 튀르키예(터키)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총영사관을 찾았다가 잔혹하게 살해된 사건을 뜻한다. 그를 눈엣가시로 여겨왔던 빈 살만 왕세자가 사건 배후로 지목됐고, 서방국 및 터키와 사우디의 관계도 급속히 악화됐다.

블룸버그 통신은 바이든이 한때 “왕따(pariah)로 만들겠다”고 했던 빈 살만과 주먹을 부딪히며 인사를 나눈 점을 꼬집어 “바이든이 주먹 인사로 사우디 왕세자의 ‘왕따’ 시대를 끝냈다”라고 보도했다. 카슈끄지가 칼럼니스트로 일했던 워싱턴포스트의 프레드 라이언 발행인 겸 최고경영자(CEO)는 “바이든 대통령과 빈 살만 왕세자의 주먹 인사는 악수보다 더 나쁘고 부끄럽다. 그것은 친밀함과 편안함의 정도를 보여준다”라는 성명을 냈다.

16일 사우디에서 열린 ‘걸프협력이사회 플러스 이집트·요르단·이라크(GCC+3)’ 정상회의에도 참석해 “미국은 중동의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파트너로 남을 것”이라며 관여 의지를 재확인했다. 그럼에도 원유 증산에 대한 공식 합의는 즉각 발표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로이터 통신은 “아랍 정상회의에서 바이든은 중요한 안보, 원유 합의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고 보도했다. CNN 등은 바이든이 빈 살만과 회담한 후 “몇 주 내에 추가 조치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 점을 거론하며 백악관이 다음 달 초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비(非)OPEC 산유국들이 함께 여는 ‘OPEC+(오펙 플러스)’ 회의에 기대를 걸고 있다고 전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석유 공급을 늘리기 위해 사우디가 몇 주 내에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양측이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관계 정상화를 통해 이란의 위협에 공동 대응하고, 중동에서 보폭을 넓히고 있는 중국 및 러시아에 대한 공동 견제에도 나설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후 파이살 빈 파르한 사우디 외교장관이 증산 및 이란 대응 논의가 모두 이뤄지지 않았다고 정면으로 부인하면서 미국에서는 바이든 대통령이 실익 없이 모양새만 구겼다는 비판 여론이 일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카슈끄지 사건을 언급하며 빈 살만 왕세자를 비판했는지를 둘러싼 진실 공방도 벌어졌다.

빈 살만 왕세자와 약 2시간 반에 걸친 회담이 끝난 후 미국 기자들과 만난 바이든은 “회담 첫머리에서 카슈끄지 피살 문제를 제기했다”면서 “미국 대통령이 인권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미국과 나의 정체성에 맞지 않는다고 매우 솔직하게 말했다”라고 했다. 빈 살만 왕세자는 “그 일과 관련해 나의 개인적 책임은 없으며 책임자들에 대한 조치를 취했다”는 발언을 했다고 바이든 대통령이 전했다. 바이든은 “나는 빈 살만 왕세자가 아마도 책임이 있을 것이란 점을 시사했다”고 강조했다.

회담 후 사우디 측도 카슈끄지 문제가 논의된 점은 인정했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바이든의 설명보다 덜 대립적이었다. 주미 사우디 대사인 리마 빈트 반다르 빈 술탄 공주는 “(바이든) 대통령이 ‘나는 단지 당신에게 분명하고 직접적일 필요가 있다’고 말하자 (빈 살만) 왕세자는 ‘당신이 분명하고 솔직하며 직접적인 것을 환영하는데 그것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라고 전했다. 또 빈 살만이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아부 그레이브 교도소에 수용된 포로들을 상대로 미군이 가혹행위를 했던 사례를 언급하며 미국도 많은 ‘실수’를 했다고 말했다고 악시오스 등은 사우디 당국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두 사람이 서로 인권 문제를 언급한 후 발표된 양국 공동성명은 관계 복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우선 사우디와 적대관계에 있는 이란의 핵무기 획득을 저지하기 위한 협력이 강조됐다. 사우디는 바이든이 지난달 주요 7국(G7) 정상회의에서 출범시킨 ‘글로벌 인프라·투자 파트너십’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유인 달 탐사 프로젝트 ‘아르테미스 협정’에도 참여하기로 했다.

한편 이란은 15일 대규모 무인기(드론) 전단이 훈련하는 모습을 공개하며 미국의 압박에 개의치 않겠다는 뜻을 강조했다. CNN은 빈 살만 왕세자가 바이든 대통령에게 이라크전 당시 미군이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포로를 학대한 사건 등을 거론하며 ‘인권 역공’을 퍼부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