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유럽에서 ‘방위 산업 투자 배제 원칙’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그동안 방위 산업은 인명 살상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투자 기피 대상으로 꼽혀왔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각국에서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는 움직임이 급증하면서, 방위 산업에 대한 투자를 ESG(환경·사회·지배구조)에 편입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3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 북동부 전선에서 한 우크라이나 군인이 대전차무기를 휴대한 채 이동하고 있다. 이날 우크라이나 협상 대표자는 비무장지대인 '인도주의적 통로' 설정을 위한 휴전 협상을 목표로 러시아로 향했다. /AFP 연합뉴스

독일 공영 도이체벨레(DW)에 따르면 스웨덴에 본사를 둔 금융 서비스 회사 SEB는 기존 방위 관련 기업에 대한 투자 금지 정책을 대폭 변경해 이 회사가 운용 중인 100여 개의 펀드 중 6개의 펀드가 오는 4월부터 방위 산업에 속한 기업에 투자할 수 있도록 했다. 앞서 ‘새로운 지속 가능성 정책’의 일환으로 방산 기업에 대한 투자를 금지한 지 1년 만이다. DW는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지정학적 긴장이 고객들의 생각을 뒤바꿨다”고 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는 피해 국가에 무기를 공급하는 행위가 ESG 측면에서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분석했다. 유럽연합(EU) 투자자들을 중심으로 방위 산업이 평화와 안정성, 사회적 재화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목소리가 커졌고, EU의 지속 가능한 투자 분류 체계에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 것이다.

방산은 도박이나 담배 등과 함께 이른바 ‘죄악주(sin stock)’로 분류돼왔다. 그러나 유럽 주요국이 러시아의 반(反)인륜적 행위에 맞서 우크라이나 국민의 안전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무기 지원에 잇따라 나섰다. 방산 분야에 대한 투자가 ESG의 사회적 요소(Social)에 부합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무기 업체들은 이러한 논리를 근거로 EU 규제 당국에 적극 로비를 펼치며 ESG 투자 편입을 압박하고 있다.

15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에서 한 군인이 러시아 침공 대비 훈련을 하면서 NLAW 대전차 무기를 발사하고 있다. NLAW는 영국에서 우크라이나에 지원한 차세대 대전차 공격용 화기다. /AP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자산 운용사들의 ESG 투자 정책이 적잖은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정학적 상황이나 해석에 따라 사실상 ESG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부 분야나 기업을 무조건 배제하는 방식의 ‘ESG 프레임’은 역설적으로 ESG의 철학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FT는 지적했다.

DW는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럽에서 지상 전쟁을 목격하는 일은 평생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며 “냉전 종식 30여 년 후 러시아의 핵무기 배치 가능성이 회자되는 이 상황은 유럽 안보 지형은 물론 재래식 무기에 대한 논의와 무기에 대한 투자, 더 나아가 ESG의 개념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고 했다.

실제 1,2차 세계 대전 전범 국가로 오랜 기간 ‘살상 무기 수출 금지’와 군비축소(군축) 기조를 유지해왔던 독일은 최근 우크라이나에 스팅어 대공미사일 500기, 대전차 로켓 1000기, 휴대용 로켓추진 수류탄 발사기(RPG) 400기 등을 지원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이외에도 옛 동독군이 보유했던 소련제 대공미사일 2700기를 우크라이나에 추가 제공하고, 네덜란드와 에스토니아가 자국산 무기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는 것도 승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