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는 ‘감(感)’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아날로그 기술의 결정체라 보면 됩니다.”

이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반도체를 넘어 한국 산업의 새로운 ‘백년지계’를 열어갈 신산업으로 꼽히는 배터리가 아날로그 기술이라니. 그것도 감으로 만든다니….

다소 생소하게 들릴 법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전기차 혁명의 주인공은 테슬라가 아니라고 과감히 단언하는 이가 있다. 대한민국 배터리 산업의 전도사로, 일명 ‘밧데리 아저씨’라 불리는 박순혁 금양 이사. 최근 ‘K배터리 레볼루션’을 출간한 박 이사는 “전기차 혁명의 시대를 연 건 테슬라가 아니라 배터리 기업”이라며 “그리고 기술의 정점에 한국 배터리 업체가 있다”고 했다.

K배터리는 어떤 기술로 어떻게 배터리 혁명을 이뤘을까?

'K배터리 레볼루션'의 저자 박순혁 금양 이사가 한국 배터리 기술의 경쟁력을 설명하고 있다. /전태훤 선임기자

테슬라로 포장된 전기차 혁명의 숨은 진실

-전기차 혁명의 주인공은 테슬라 아닌가?

“배터리와 이차전지를 이해하려면 테슬라와 전기차에 대한 오해부터 풀고 가야 한다. 다들 테슬라가 전기차를 시작한 것으로 알지만, 인류에겐 전기차가 먼저였다. 스코틀랜드의 발명가 로버트 앤더슨이 최초의 전기차인 ‘원유 전기 마차(crude electric carriage)’를 발명한 때가 1834년이다. 독일의 니콜라우스 오토가 1864년 최초의 내연기관을 발명한 것보다 무려 30년 앞섰다.

상용화도 전기차가 먼저였다. 1881년 파리 국제전기박람회에서 구스타프 트루베가 삼륜 전기차를 선보였고, 1898년엔 독일의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전기차 ‘포르쉐 P1′을 개발했다. 1897년 미국 뉴욕에선 전기 택시 공급이 시작됐고,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는 전기 자동차를 소방차로 쓰기도 했다.

잘나가던 전기차 시대를 끝낸 이는 ‘자동차왕’으로 불리는 포드의 창업자 헨리 포드다. 그는 1908년 컨베이어벨트를 이용한 대량 생산 방식으로 모델 T형 차를 내놓으면서 전기차 아성을 무너뜨렸다.

100여년간 잠들었던 전기차 기술을 테슬라가 깨웠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전기차는 아무나 만들 수 있다는 거다. 전기차의 심장인 배터리를 누가 어떻게 잘 만드느냐가 관건이다.”

배터리에 대한 5가지 거짓과 오해

-공개된 산업에 무슨 오해가 있나?

“일명 ‘밧데리 아저씨’라 불리면서 직접 책도 쓰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여전히 대중들에게 실상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지 않아서다. 우선 테슬라와 폭스바겐 같은 자동차 제조사가 직접 배터리를 만들 거란 거다. 두 회사 모두 전기차의 심장인 배터리를 자체 제작하겠다는 이른바 ‘배터리 내재화 선언’을 했지만 자체 배터리를 달고 출시하겠다던 신차 계획은 번번이 불발됐다. 그 사이 한국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들이 속속 출시됐다.

테슬라가 내놓겠다는 원통형 ‘4680 배터리’는 테슬라 순수 기술이 아닌데다, 소재 관련 기술이 낮아 업계 판도를 바꿀 거란 예상도 미지수에 가깝다.

글로벌 배터리 시장 점유율 1위인 중국 배터리 기업 CATL이 고평가됐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중국 내수 시장의 왜곡에 따른 점유율이라, 이를 보정하고 보면 한국 배터리 기업의 점유율이 압도적이다. 중국 시장을 제외한 한국 배터리 업체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56.0% 정도다. CATL의 점유율은 18.9%다.

또 중국 배터리가 더 가볍고, 쉽게 교체하고, 값싸고 오래 가는 배터리 제조 기술을 가졌다고 하지만 이들 기술이 대부분 과대포장됐고, K배터리를 따라잡기 위한 고육책으로 도입한 불완전한 기술이다.

테슬라를 시작으로 많은 제조사들이 중국의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를 쓰면서 우리 기업이 만드는 니켈코발트망간(NCM) 삼원계 배터리의 전망이 밝지 않다는 우려도 기우에 가깝다. 중국 시장을 놓지지 않으려는 테슬라가 전략적으로 중국 배터리를 선택한 것이다. 여기에도 중국 착시가 있는 거다. 배터리의 경쟁력은 에너지 밀도와 관련이 깊은데, NCM 배터리가 LFP에 비해 월등하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LFP는 중국 내수용 배터리 기술이다.”

K배터리의 기술 초격차

-국내 배터리 기업의 핵심 기술은 뭔가?

“배터리 혁명의 핵심은 좋은 배터리를 얼마나 빨리 더 싸게 생산하느냐에 달렸다. 싸고 가볍고 부피가 작아야 좋은 배터리다. 여기에 가장 근접한 나라가 한국이다. 한국은 안정성을 확보하면서 니켈 함량을 높여(80% 이상) 에너지 밀도를 높인 ‘하이니켈(high-nickel)’이란 양극재 기술에서 월등히 앞서있다. 양극재는 배터리 충전 양과 전압을 결정하는 핵심 물질인데, 니켈 함량을 90% 수준까지 높인 울트라 하이니켈 기술을 적용하면 20% 이상 가볍고 20% 이상 오래 가는 배터리를 만들 수 있다. 이 기술을 구현한 양극재 회사가 전 세계에 딱 네 곳이 있는데, 모두 한국 회사다. 이들 회사를 ‘양극재 4대 천황’이라고도 하는데, 그만큼 글로벌 이차전지 산업계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니켈의 함량을 줄이고 저렴한 망간의 함량을 높여 가격을 크게 떨어뜨린 ‘하이망간’ 양극재 기술에서도 이들 회사가 다른 나라 경쟁사들보다 훨씬 앞서있다.

화재 안전성 확보에서도 한국 기술력이 압도적이다. 우리 기업들은 화재 사고도 겪고 대규모 리콜도 경험했다. 하지만 ‘배터리는 경험 산업’이란 말이 있다. 대규모 화재 리콜 비용이라는 ‘수업료’를 치르고 얻은 화재 안정성 기술은 이제 중국이나 일본이 넘볼 수 없는 수준이 됐다.”

박순혁 금양 이사가 배터리 산업을 둘러싼 오해를 풀고 정확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전태훤 선임기자

뚝심으로 버틴 힘

-한국의 이차전지 경쟁력은 어디서 나오나?

“한국 기업이 배터리 핵심 기술을 선도할 수 있는 결정적 요인은 중도에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끌고 갔다는 데 있다. 소니는 1991년 이차전지 사업에 가장 먼저 뛰어들었다. 그랬던 소니는 2006년 노트북에 들어가는 배터리가 폭발하면서 엄청난 배상을 하고 이후 배터리 사업을 접었다.

LG는 소니보다 1년 늦은 1992년에 뛰어들어 1997년 시제품 생산에 성공하고 지금은 배터리 분야 세계 최고 수준의 기업이 됐다. 하지만 품질 문제로 상용화가 어려웠고 적자는 계속 누적됐다. 2001년엔 주요 계열사 경영진이 사업 철수를 제안했고, 2005년엔 이차전지 사업의 적자가 2000억원에 달할 정도로 상황이 나빠져 사업 포기 직전까지 갔다. 여러 차례 사업 중단의 위기가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거듭된 실패를 딛고 일어선 것이 지금의 경쟁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2007년부터 양극재 개발에 나선 에코프로는 10년이 넘도록 가시적인 연구개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적자가 누적되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수익 없이 투자만 해야 했던 10년의 세월이 지옥과도 같았다’던 회사 대표의 회고도 있었다. 하지만 힘든 시간을 버텨냈기에 지금 양극재 시장의 최고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거다.

1만번의 실패를 10년간 계속 해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 봐라. 혜안과 뚝심으로 만든 결과다.”

고려청자 기술의 재현

-초격차 기술도 따라잡히지 않을까?

“고려청자 이야기가 필요하다. 고려청자가 인정받는 두 가지 요소는 ‘상감기법’과 ‘비색’인데, 이 중 비색의 비밀이 양극재 기술과 관련돼 있다. 고려청자의 비색은 물감을 덧칠한 것이 아니라 흙 속에 감춰진 색을 화학 작용을 통해 끌어낸 것이다. 화학 작용의 원리는 간단하지만 실제로 구현하기 너무 어렵다는 데 있다.

양극재를 제조하는 과정이 바로 청자를 가마에 구워 비색을 내는 것과 같은 원리다. 제대로 된 비색을 내려면 가마에서 굽는 온도와 습도, 바람 등의 조건이 일정하게 맞아야 할 정도로 주변 환경에 초민감한데, 배터리 제조도 환경에 극도로 민감하다. 니켈, 코발트, 망간을 적정 비율로 혼합해 열을 가하는 ‘소성’ 과정이 바로 청자를 가마에 구워 비색을 구현하는 것에 해당한다. 이 재료들을 어떤 비율로 하느냐에 대한 양극재 회사의 노하우가 경쟁력을 좌우하는데, 우리 기업들의 기술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수백 년 전 고려청자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배터리는 생물(生物)…아날로그 기술의 결정체

-제조 ‘레시피’가 어려운 이유가 뭔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배터리는 ‘감(感)’으로 하는 거다. 배터리는 아날로그 기술의 결정체라 보면 된다. 제조 배터리 과정에서 수율(양호한 제품의 비율)을 잡는 과정이 있는데, 거기에 감이라는 기술력이 들어간다.

한국에서 우수한 수율로 배터리를 생산했던 LG에너지솔루션이 폴란드에 공장을 짓고 현지에서 수율을 잡는 데 무려 4년이 걸렸다. 같은 제품을 같은 기술로 만들어도 결과가 달라지는 게 배터리다. 오늘 환경에서 제조되는 것과 다음 달 생산되는 배터리가 다르다. 배터리는 살아있는 생물과도 같다.”

박순혁 금양 이사가 배터리 업계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원 확보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전태훤 선임기자

부족한 자원이 ‘원죄’

-한국 기업의 약점은 없나?

“기술력에서 K배터리가 중국을 압도하는 것은 명확하다. 그렇다고 해서 K배터리가 세계를 쉽게 제패할 거라 낙관할 수도 없다. 배터리 산업은 구조적으로 광물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데 한국은 필요한 광물이 턱없이 부족하다. 광물 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측면에서 한국은 중국에 비해 매우 취약하다.

특히 에너지 저장원인 리튬은 희귀 금속으로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배터리 산업이 발전할수록 리튬 부족 상황은 앞으로도 계속될 거다. 양극재에 필요한 니켈, 코발트도 확보하는데 많은 노력이 요구되는 자원이다.

포스코그룹이 아르헨티나의 소금호수(염호) 개발권을 사들여 2024년부터 리튬을 추출∙생산하는 시설을 완공할 예정이고, LG에너지솔루션이나 SK온 등의 배터리 회사들도 호주와 캐나다, 독일 등의 리튬 개발 업체와 장기 공급 계약을 맺고 있지만 여전히 리튬 공급은 부족하다. 자원 외교로 진출했던 사업들이 지난 정부에서 끊긴 것이 아쉽다.”